슈투트가르트의 첫인상은 '낙엽 냄새가 나는 도시'였다. 아직도 기온이 30도를 상회하는 대한민국의 9월에 비해, 이곳은 10도 언저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은은한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하루만에 10카이(ㅋㅋ) 떨어진 기온에 적응하지 못해 더더욱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는 왜일까, 내 홈을 떠나기 전부터 홈식에 시달렸다. 고향에서 느끼는 향수병이라니 웃기는 일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태연하던 9월 셋째 주까지와는 달리, 출국하는 주에 닥치자 나의 정서는 급격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전까지 내가 자주 하던 말은 이랬다: "사람들 전부 나 빼고 내가 가는 걸 실감하고 있어. 나만 못 느껴. 아무 생각이 없어." 이것은 명명백백한 진실로, 나는 정말이지,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나의 떠남을 실감하게 된다...
우울함을 이겨내가는 출국날, 입독 1, 2, 3일차의 기록.
출국, 비행기
대구공항에서 슈투트가르트에 갈 수 있는 편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내가 택한 건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편이었다. 다른 건 없거나 너무 비싸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나의 여정은 상당히 길어지고 말았는데...이 날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서 동대구역까지 가고, 10시 40분에 4시간짜리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반 가량 공항에 일찍 도착한 후, 비행기를 1회 경유해 익일 DE 6시(한국 13시)에 도착했으므로, 대략 집을 나가서부터 22시간쯤 후에 독일에 들어온 셈이다. 게다가 호텔 입실을 15시쯤 했으므로 31시간을 밖에 있었다! 이것은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인도어 인간에게 극심한 피로였다. 그렇다, 세상에는 인도어 외향인이란 게 존재한다.
이것이 나의 차편. 직항은 너무 비싸고, 2회 경유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됐다. 민이의 추천에 도움을 받았는데, 베트남항공의 서비스가 무척 품질이 좋으며, 2시간 반 경유도 최적의 시간이라는 평이었다. 그보다 길면 힘들고 짧으면 바쁘다고. 개인적으로는 밤 비행기라 마음에 들었다. 자면 되잖아!
당일, 빵떡이가 인천공항까지 함께 배웅해 주었다. 나와 빵떡이 모두 점차 심란해지더니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빠르게 수속을 밟을 때에는 둘 모두 죽상이 되었다. 민이가 심경을 물어보던데 뭐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Dramatic exit는 아니었고...그냥 굉장히 우울하고 피로했다. ㅎ... 닥쳐올 미래를 둘 다 한껏 모른 척한 채 밝게 대화하는 건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솔직히 출국 전보다 출국 이후가 정신건강에 더 나았다. 수능 공부할 때 영어지문에서 읽고서 자주 인용하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닥쳐올 재난을 걱정하는 것은 재난 그 자체보다 나쁜 일이다". 정리해고 일자 통보 이후 사원 전원의 우울증이 높아졌다가 정작 해고된 뒤에는 해고되지 않은 사람도, 심지어 해고된 사람도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수속은 평범했다. 베트남 항공 처음 타 봐서 외국인이 수속해 주려나 두근두근 긴장하고 있었는데, 인천공항 직원은 전부 한국인이었다. 다들 현지에서 파견하는 듯. 그리고 이상하게도 파견 나온 대한항공 직원이 절반이었다. 빵떡이가 유니폼을 보고서는 귀띔해 주었는데, 모두들 항공사별 유니폼 같은 거 외우고 다니는 건가? 나만 몰라? 조금 의문이 들었다.
편도였기에 돌아오는 편은 어떻게 하냐 물어보았고, 체류한다고 하자 비자를 받아 가는지 확인했다. 보여드리니 잠깐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시다며 통신을 주고받은 후, 미리 구매한 추가 수하물까지 포함해 수하물을 부쳐 주셨다.
참고로 나의 짐은
- 캐리어 1개, 45L 가방 1개(위탁수하물 - 1개 추가)
- 백팩 1개(기내수하물)
- 힙색 1개(몸에 지니고 다님)
였다. 따로 포스팅했지만, 이 크기로 짐을 줄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ㅋㅋㅋ 무소유의 마음을 배우는 과정(가서 살 거지만)... 그리고는 티켓을 두 장 주시고 게이트로 찾아가는 약도를 함께 주셨다.
내가 가야 하는 게이트는 인천공항 내에서 트램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빵떡이와 인사를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자 조금 눈물을 말려야 했다...ㅋㅋㅋㅋ 돌아보면 짐도 무겁고 컨디션도 별로라서 더 그랬다. 집을 나온 아침부터 수속하는 18시까지 종일 먹은 거라곤 휴게소의 소떡소떡 반 꼬치와 아침햇살 반 페트뿐이었는데 아무것도 입에 들어가질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속 및 게이트까지 이동, 가족들과 빵떡이에게 마지막 통화를 하고 나니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 분명 2시간 반 정도 여유를 뒀는데?! 이래서 공항엔 3시간 전에 도착하는 게 좋다고 하나 보다.
베트남항공은 듣던 대로 좋은 곳이었다. 일단 담요와 베개를 주고(ㅋㅋㅋ) 깔끔하고 시설도 좋다. 의자는 좀 좁지만 난 이거 좋아한다. 허리가 안 아파서. CES 갈 때 탔던 그 좌석이다.
민이가 '미인들이 예쁜 옷 입고 친절하게 대해줘'라고 평해서 이 20대 여성의 50대 할배 같은 평에 엄마랑 같이 3분 동안 웃었는데 과연 말 그대로였다.
이런 스크린도 붙어 있다. 왠지 영화 코너에 서울의 봄도 있었다...기계적으로 블랙잭을 10분쯤 하다가 잠에 들었다.
이때의 꿀잠에 대해 말하자면...이 전날까지 본가에 있었는데 환절기 알레르기 비염이 심하게 도져서 엄마가 처방약을 하나 챙겨주었더랬다. 온 가족이 알러지 비염이라 단골로 가는 이비인후과에서 타온 약을 공유해 먹는데(이러면 안 되지만 완전히 증상이 똑같아서...가족끼리니까ㅋㅋ), 내가 고생하는 걸 보고는 가져가라고 하신 것. 나는 처방약은 처방전 있어야 가져갈 수 있고 어차피 시판 알러지약 먹으면 된다며 거절했으나, 그러면 공항에서 먹으라고 한 봉 쥐어 주시는 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요긴하게 쓰였다. 당일이 되니 비염이 더 심해졌기 때문에.
수속 도중에 생각나서 약을 먹었더니 비행기에 엉덩이 붙이자마자 미친 듯이 잠이 왔다.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세 번쯤 잤다 깼으니 말 다했다. 비염약은 원체 잠이 오는 약인데 반 공복에 먹었으니 안 졸릴 리가 있나... 비행기야 뜨든 말든 신나게 자고 있었더니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음료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잠결에 반쯤 잠꼬대로 '워...원 플리즈'라고 했더니 맥주가 한 캔 생겼다? 젠장 뭐 있는지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왜 자다 깨서 맥주를 마시고 있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으나* 준 이상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도리이니 그냥 마셨다. 속 버릴까 해서 나누어 준 콩과자도 열심히 먹었다. 와사비콩은 언제나 멋진 안주다.
*아무도 못 알아듣겠지만 이 대사는 <스킵과 로퍼> 10권 마지막의 플러스 컷에서 시마가 하는 대사를 오마쥬한 것이다.
그러고 또 기절잠을 자고 있었더니 이번엔 기내식을 준다. 3시간 반 짜리라 안 줄 줄 알았는데 무척 횡재한 기분이었다. 베트남항공이 밥 잘 주기로 유명하다더니 과연 정말 정말 맛있었다!!!! 민씨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ㅠ 급식실의 밥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습기가 송골송골 맺힌 도시락을 열면 치킨살과 치즈가 얹어진 김치볶음밥이 나온다(사진 보니까 또 먹고 싶다). 적당히 차가운 치킨?오리?샐러드도 일품인 데다, 내 입맛엔 조금 과하게 달았던 초콜릿 케이크도 비행에는 꽤 도움이 되었다.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싹싹 긁어먹고 나자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탄수를 먹지 않아서였을까? 다 먹고 커피까지 알차게 마셨다.
(사족으로, 베트남은 커피에 설탕이나 크레마 넣어 먹는 걸 선호하나 보다. 아니면 친절이 과하거나. 커피 두 번 마셨는데 두 번 다 승무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건 안 필요하세요?'라고 묻고는 했다.)
(사족을 하나 더 붙이자면 물은 거의 안 마셨다. 화장실 가기 싫어서(ㅋㅋ). 여행에서 일반적으로 가리는 세 종류가 밥, 잠, 화장실이라면, 나의 경우 앞의 두 개는 비교적 무던한 편이나 화장실을 좀 가린다. 위험한 곳에서는 취약 상태가 되지 않으려는 동물적 본능인가...때문에 거의 탈수 상태에서 조금씩만 적셔 주는 전법을 취했다. 여러분은 이러시면 안 됩니다(다소 너네는 이런 거 피지 마라 같은 발언))
밥을 먹고 나자 잠을 좀 깨고 싶어서(사유: 뒷목이 너무 아픔) ebook으로 미리 다운로드해 둔 <지구 끝의 온실>을 읽었다. 이거 읽다가 너무너무 좋아서 앉은자리에서 현기증이 나서...잠시 덮고 좀 쉬었다. 하... 아무런 기능도 없는, 그러나 결국은 제거되지 않은 푸른 빛...
잠은 쿠션에 둘러싸여 윤택하게 잤다. 제공되는 담요 하나에 솜베개 하나, 그리고 민이가 유학 기념 선물로 준 메모리폼 목베개. 목베개를 원래의 용도대로는 사용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라 하면...좌석이 내 뒤통수를 자꾸 앞으로 밀어제끼는 모양새라 목베개를 했다간 당장 바다로 돌아가야 할 자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가 자리를 택한 일생, 창문 옆 왼팔 아래에 베개를 낀 후 팔짱을 끼자 기가 막힌 꿀잠 자세를 얻었다. 결론적으로 수면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 유명한 비둘기 코딩 밈 같다. 날개가 아닌 목을 돌리지만 아무튼간 날아가기는 하는 야매 코드...
하노이 공항~ 여기서 경유를 했다. 위에서 바라보는 밤의 하노이는 무척 멋지다.
해외에서 비행기 혼자 타 보는 게 처음이라 경유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는데...정말 쉽다. 어차피 자가환승 아니니 짐도 항공사에서 알아서 옮겨주고(확인차 인천공항에서 한 번 더 물어봤다.) 가는 길에 친절하게 표지판도 덕지덕지 붙여 뒀고. 중간에 여권 검사받아야 하는 구간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려다 제지당하긴 했지만(ㅋㅋ) 내가 워낙 느릿느릿하게 가고 있었던 탓에 여권을 보여준 후 무사히 입장할 수 있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느리게 행동하는 방법을 취해 보자...
하노이 공항을 조금 구경할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일단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체력이 바닥이었고... 게이트도 멀어서 그냥 일찍 가 있었다. 남는 시간은 의자에 앉아 도착 후의 계획이나 세우기로 했다. 숙소에 체크인하고, 논문 파이널 점검만 한 후, 마트에서 유심이랑 요거트, 빵, 건전지를 사오고, 푸지게 자고, 온라인 안멜둥, 온라인 계좌 개설, 온라인 개통.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숙소에 처박혀 블로그만 쓰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는 이걸 일 주일에 걸쳐서 겨우겨우 하게 된다. 하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 가는 ICE를 예매하고,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두 개 다운로드받고 나자 다시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다. 이것 역시 민이의 말대로였다. 두 시간 반이면 딱 여유시간만 있는 정도이다.
나 장거리비행 잘 하나 보다...싱가포르는 단거리라 치고, 미국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인데, 뭐 지루할 새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드렁슨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아마 밤 시간대인 점과 비염약의 힘이 컸겠지만. 19시간의 비행에 대비해 책 세 권에 영화 두 편을 다운로드받아 갔는데 실제로 본 건 책 한 권뿐이다.
생물학도라면 모두들 <지구 끝의 온실>을 보셔야 합니다...주위 사람들에게 '주인공이 수요일에 생자원관에서 샘플 받아서 이번 주까지 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마침 보고서 시즌이라 공실관 예약 다 차서, 사유서 쓰고 밤에 예약해서 VOC 분석이랑 WGS 했다'라고 하니 전원 '그거 네 일기 아니고 소설 내용 맞냐'라고 반응했던 기억이 ㅋㅋㅋ
새로 비행기를 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밥을 줬다. 한국 기준 새벽이라 잠 와 죽겠는데 독일 기준 저녁시간인 건지...난 존나 쿨쿨띠하고 싶었는데 먹으라고 깨우니 별 수 있나, 깨작대다 다시 잤다. 밥은 맛있었는데 샐러드와 디저트는 영 별로였다. 아무래도 김치볶음밥이 한국인 기준 GOAT이긴 했던 듯...어느정도 식사가 마무리되자 다시 불을 꺼 줬다. 불 꺼주면 자고 불 켜면 일어나는 삶이라니, 새도 아니고. 새일생은 그대로 잠들어 긴 잠을 잤다. 분명 비행 시작할 땐 Arrival까지 11:30이 찍혀 있었는데 눈 떠보니 6:40 정도 남아 있었다. 일기를 쓰고 사색을 좀 하다 Offline Games를 몇 판 했다.
하차 3시간 전부터가 살짝 고비였는데, 다들 추워서 재채기하고 있었다. 코트까지 입고 있었는데 콧물이 안 멈춰서 손수건과 휴지로 무한의 콧물쇼...아마 엄마가 준 비염약이 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엄마! 개겨서 죄송해요! 한 봉지만 더 줘요! 다음 비행에는 두툼한 천 마스크를 하나 챙겨가는 게 좋을 것 같다.
2시간 전이 되자 데운 물수건을 줬는데 너무 좋았다...얼굴 기름 닦으라는 뜻인가? 온 얼굴로 물수건의 온기를 흡수했다.
태블릿을 보고 있다가 문득 패드 펜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 잃어버린 거지?! 사방팔방 바닥을 돌아봤지만 좁은 행동반경 내에서 잘 되지 않았다. 추가로, 힙색의 지퍼 두 개에 2개 한 쌍인 열쇠고리를 각각 달아 뒀는데, 인형의 군번줄도 스르륵 끊겨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분명 처음에는 손에 닿는 위치에 떨어졌었는데 잡으려 하자 좌석의 연결부 안쪽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미약해진 심신으로 이 두 개의 분실은 필요 이상의 좌절감을 불러일으켜서(ㅋㅋ) 실의에 빠져 좌석에 기대 누웠다.
한 시간 반 전엔 밥도 또 줬다... 지금 독일 기준 새벽 4시반인데... 고맙다 얘들아...
크로와상 맛있더라...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가슴이 뛰었다.
나갈 때 혹시나 바닥 더 뒤져 봤지만 펜 같은 건 안 보이더군...
입국심사도 조금 떨렸다. 이유인즉슨 내 앞 두 팀이 10분은 걸렸기 때문. 옆 라인은 죄다 열 팀쯤 나가고 있는데 내 줄은 두 팀 보고 있으니 빨리빨리 한국인은 속이 탔다. 지금 와서 줄을 옮기자니 좀 수상해 보이는 것 같아서(ㅋㅋ) 어거지로 버텼다. 정작 나는 슈퍼패스. 한국인인 데다 비자도 있으니 끝이었다.
Q. 뭐 하러 왔어?
A. PhD 하러. 3년.
Q. 비자는 없고? 아, 여기 있네. ㅇㅋㅇㅋ
진짜 이게 끝이었다. 땡스 투 코리안 외교부.
짐을 어디서 찾는가도 내 나름의 과제였는데 ㄹㅇ 기도메타로 찾았다. 아니 그냥 걷다 보니 내 캐리어가 보이던데...?
아직도 공항 짐 어디서 찾는지 잘 모른다. 전광판이 없으면 표지판이라도 세워줘야 할 것 아니야~! 어디 비행기 거다 하고~!
출국 전 빵떡이가 나보고 캐리어에 백팩에 저 45L 가방까지 멜 수 있겠냐고 한참을 걱정했지만 그냥 45L 가방을 캐리어에 묶어 가니 어렵진 않았다. 캐리어야 뭐... 바퀴 달렸고... 바퀴가 고생이지 내가 고생인가. 짐을 다 찾고 나니 시간은 6:50. 도착 후 약 한 시간 걸렸다.
미리 ICE역 가까이 가있기로 결정. 내가 내린 곳은 터미널 2인데, ICE 역은 터미널 1과 이어져 있어서 트램을 타야 했다.
터미널 1로 가는 길은 그냥 표지를 따라가면 찾아진다. 에스컬레이터 타고 2층으로, 걷다가 또 에스컬레이터 타고 3층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언뜻 독일 대중교통에서 대화는 해도 되지만 통화는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서 읽은 것 같아서 말았다.
빠르게 터미널 1 도착. 내 ICE는 9:53에 출발하는 차편이라 시간이 무척 넉넉했다.
터미널에서 ICE 승차장에 가려면 롱 디스턴스 트레인 표지를 따라가면 된다.
롱 디스턴스는 ㄹㅇ로 롱 디스턴스를 가야 한다...가다 지친다.
넉넉한 기차로 잡아두었기 때문에 시간은 남아돌았지만 일단은 초행길이니 끝까지 가본 후 어디서 시간을 때우든 하기로 했다.
이곳이 바로 ICE를 탈 수 있는 승차장.
당연히?! 리스트조차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차는 9시 53분 거다. 이땐 7시 22분이었고.
한 시간 뒤 정도까지 뜬단 말이지? 8시 50분 귀환을 약속하고 오는 길에 본 무척 맛있어 보이는 빵집으로 돌아갔다.
또 이만한 짐을 바리바리들고 화장실을 어떻게 가나 고민이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저는 "안 가는 방법"을 선택했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민머리의 캐릭터가 떰즈업 하고 있는 이모티콘)
농담이고 화장실 칸이 존나 넓어서 캐리어 하나쯤은 문제없이 들어갑니다 데리고 보세요.
화장실을 빠져나온 후 크로와상과 커피를 구했다. 원래는 앉아 먹을 생각이었지만 만석이라서 가지고 승차장에 돌아갈 수밖에.
수줍은 미소녀가 웃으면서 환대해 줘서 정신 못 차림...내 카드 귀엽다고 해줬다...^ㅠ^
외국인 미소녀에게 관심 받고 싶다면 토심이 카드를 쓰십시오 여러분.
역에 수없이 둘러놓은 의자조차 만석이기에 여유로운 뉴요커인 척하며 입석에 서서 먹었다. 그래도 사람이 기대 있을 만한 공간을 충분히 조성해두어서 편했다.
미소녀의미소에비해 커피는 좋나썼지만 리프레쉬 완. 크로와상은 걍 크로와상이었는데 조직감이 좋았다.
공항을 벗어났으니 대강 여기부터 독일 생활 1일차로 기록하겠다.
1일차
크로와상과 좋나쓴커피를 즐긴 이후에는 남은 한국 현금 환전도 좀 하고...편의점도 들러 보고...유심칩이 있나 구경했으나 초콜릿이나 잔뜩 보다 왔다. 내가 산 건 AA건전지(...)와 물갈이 방지용 요거트.
기차를 올바르게 찾아 타는 법은 이 블로그를 참조했다. 요약하자면, 전광판과 대조해 가며 타면 된다. 이분 말씀대로 기차 내 이동은 정말 혹독한 일이니 처음부터 잘 찾아 타도록 하자.
https://brunch.co.kr/@nomad-lee-in-eu/106
내 차편 승강장 바뀌어서 E였는데 F로 오더라...그리고 알고 보니 나 1등급석 예매했더라? 아이시발 어째 존나비싸더라니
기차를 기다리며 연락을 주고받는데 지금 보니 죄다 춥다는 소리밖에 안 해뒀다. ㅋㅋㅋㅋ 알러지 비염 때문에 콧물은 안 멈추지, 기온은 춥지, 아니 한국 10도는 이렇게까지 춥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독일 10도는 아주 그냥 뼈가 시렸다. 민이가 이런 말 한 것 같은데 그땐 흘려들었죠...미안합니다...사람이 이렇게 겪어 봐야 압니다...
기차 내부는 무척 깨끗하고 쾌적했다. 다만 승객들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누가 독일 사람들 무뚝뚝하고 노잼이랬냐...기차에서 독일뽕짝 틀고 떼창하고 있는데...와중에 독일 애기가 나에게 강한 관심을 보여 대위기를 맞았다. 계속 나에게 할로 하고 인사를 시도해서 나도 대답해 주자 무한의 할로 굴레에 갇혔다. 왜 애기들은 날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하는 걸까...? 여태까지는 내 외관이 아기들에게 조금 호감상인 탓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독일 아기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나중에는 눈 좀 붙이느라 내가 놀아주지 않자 울며 화내는 지경에 이르러서 일단 달래기 위해 영수증으로 종이학 접는 진기명기를 보여주고...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왜 독일까지 와서 남의 애를 봐주고 있지...굉장히 낡고 지친 나는 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몹시 괴로워졌으나 아기 부모님들이 무척 죄송해하는 게 눈에 보여서 적당히만 놀아 주었다. 와중에 저먼젊은이들의 독일 뽕짝 떼창은 계속되지, 술 취한 독일 아재가 날 중간에 끼고 앞 칸 아재한테 뭐라뭐라 하고 있지, 복도칸에서는 개가 짖고, 아기는 날 보고 기웃거리고...혼란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화합과 혼돈 사이 기묘한 경험이었다.
고비 끝에 무사히 슈투트가르트에 도착. 와...드디어 내가 살 곳이다...나는 정말 한시라도 빨리 숙소에 드러눕고 싶었으나 체크인이 14시부터라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때워야 하는 시간, 역 앞 도보로 10분 걸리는 알디마트에 가서 유심과 먹을 것을 산 후 숙소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이 날이 토요일이라는 것도 있었다. 독일의 일요일은 모든 것이 문을 닫는 날이다. 마트든 식당이든 뭐든. 내일 먹을 것을 오늘 내로 확보해야 하는 이상,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짐 3개 끌고 도보 10분은 쉬운 길은 아니더군...ㅋㅋㅋ 바닥이 굴곡이 많은 타일이라 캐리어 바퀴 닳을 게 꽤나 걱정됐다. 캐리어는 바퀴 달렸으니 고생 아니라고 생각한 공항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걸어가는 길목에 버스킹을 두 팀, 무대 공연을 한 팀 봤다. 버스킹 중 한 팀은 중노년 남성분 2인조였는데, 콘트라베이스와 트럼펫의 조합이 끝내주게 낭만적이었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부스도 꽤 늘어서 있었다. 풍선과 타투, 뭐시기 꾸미기 이벤트 같은 게 있었고, 소시지를 자글자글 굽는 냄새가 났다.
알디마트 뼈 빠지게 왔는데 정작 유심은 못 샀다. 없는 건지 못 찾은 건지...먹을거리나 몇 개 사서 나왔다. 물론 이것 때문에 짐 무게는 더더욱 불어났다.
마트를 나온 후 나무 앞의 의자에 잠시 널부러져 있다가 다시 U bahn 역으로 이동. 엘리베이터를 못 찾아서 계단 내려가겠답시고 깽깽 고생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여자분이 캐리어 내리는 걸 도와주셨다. 하...진짜 감사합니다...ㅠㅠㅠ
U bahn을 타려고 VVS를 깔아서 e ticket을 발권했는데, 이 과정도 쉽지 않았던 것이 ㅋㅋㅋ 데이터가 느리니까 페이가 개노답이더라...미리미리 발권하자. 로밍이라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유심 개통한 뒤에 느낀 바로는 그냥 다 똑같다. 한국이 너무 빠른 거다.
한국의 데이터 속도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피로한 심신으로 온갖 쌍욕을 내뱉으며 발권에 성공했다. 근데 잘못 샀다. 두 번 산 거 보이시죠? 아까운 내 5천원. 많이 돌아다니실 거면 그냥 미리미리 월 정기권 끊어두시는 걸 추천한다. 특히 학생들은 학생 패스가 있으니 매달마다 역무실 가서 끊어달라고 하면 된다. 나도 아마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때는 끊지 않았다. 서류처리가 복잡한 탓에 우선 첫 달은 내 돈으로 정기권 끊기로 결정한 것은 조금 나중의 이야기...
U15는 지상철인데, 거리가 너무 예뻤다. 지친 심신으로 심통 난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근데시발내가또거꾸로탔다는소식 ^^^^^^^^ 난 분명히 구글 맵이 시키는 대로 갔는데 억울하다. 욕설을 백만 개 내뱉으며 다시 역방향 차를 탔다. 역방향 편 탈 때에도 구글 맵이 이상한 데 찍어준 걸 보면 약간 오류가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모두들 U bahn 길 찾을 때에는 꼭 Citymapper를 애용하도록 하자!
독일 열차는 개폐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니까 기억해 둡시다...이것도 봤는데 까먹었다. 문이 안 열려서 어리둥절 서 있으니까 누가 눌러줌 ㅋㅋㅋㅋㅋ 정말ㅅㅂ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숙소로 갔다ㅠㅠ 고맙다 독일! 누가 독일 사람들 불친절하댔냐! 이렇게 정이 넘치는데! ㅠㅠㅠ
낡은 심신으로도 잡생각을 멈추지 못하는데...와중에 느낀 점은 벽에 그래피티가 많다는 것. ICE랑 U bahn 타는 내내 보이더라...
숙소까지 오는 길은 끝까지 좃뺑이였다. 도보 15분인데 오르막 내리막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거의 기어서 갔다. 아니 이게 모양은 좀 그래도, 몸을 굽혀서 캐리어를 미니까 훨씬 쉽더라고요 오르막길에서는? 잠 이상하게 잔 머리로 땀 흘려 걸었더니 아드레날린이 폭발해서 나중에는 실실 웃으면서 뛰어갔다. 물론 상체를 숙인 자세로 캐리어를 밀며... 선량한 동네 주민들, 위협이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3층까지 짐을 끌고 계단을 오르자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었다. 숙소는 호텔을 빙자한 게하였다. 딱 게하에 1인실 예약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3일 묵을 건데 그리 많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방에 세면대 달려 있는 게 영 교도소 같은 느낌을 연출했기에 가족들에게는 세면대가 보이지 않는 각도로 찍어 보내주었다.
빵떡이랑 쪼끔 울면서 통화하고...가족들에게 카톡 보내고...사온 것들을 먹고 싶었지만 식기가 없었다. 게하니까 공용 주방에 나가 보면 그릇이 있긴 하겠으나, 그걸 가지러 갈 힘도 없어서 차가운 호밀빵을 씹어 먹었다. 빵은 또 좋나게 맛없었다. 치아바타 원래 맛있는 빵 아니야? 이 치아바타는 딱딱하고, 수분이라곤 없고, 호밀 냄새가 심하게 나는 데다가 우유와 함께 들려 와서 차갑기까지 했다. 빵 씹다 그냥 웃겨서 이게 먼 짓이고...하고 인스타 스토리로 올렸다. 해학의 민족은 해학으로 산다.
이거 인스스 올리니까 과연 어그로가 엄청나게 끌려서...사람들 디엠 개 많이 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도소코어;;
정 선배가 안부 물어봐 줘서 두 시간 대화하고 나니 위안이 좀 되었다. 하...연구실 자존감 지킴이...
보면 알겠지만 빵이 무척 크긴 하다. 이만한 크기에 0.79유로니까 가격도 저렴하다. 그래 어쩐지 그런 맛이더라.
물(개 맛없음), 귤, 우유와 시리얼, 하몽도 추가적으로 구해 왔다. 나름대로 탄단지 식이섬유를 충분히 챙기려는 시도였다.
식재료 가격은 상당히 저렴하다. 유럽의 좋은 점.
누워서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ㅠㅠ) 몸과 마음의 체력이 충전이 되어...간신히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빵떡이랑 또 통화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트북 켜서 티웨이 한 번 들어가보란다? 확인한 바 티웨이 이벤트로 인해 서울-프랑크푸르트 "직항" 가격이 무려 편도 20만원이었다. 뭐라고??? 왜 나 때는 이런 이벤트 안 해줬어?! 물론 공항 이용료와 수수료 더하고 나면 좀 오르긴 했지만 70선에서 직항 왕복이 가능했다. 빵떡이는 이 정도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겠다며 무척 좋아했고 나도 상상 이상의 가격에 신났다.
이대로면 몸살감기를 크게 앓을 것이 자명했으므로 선제적으로 테라플루를 처방하기로 했다. 그런데 방에 전기포트도 없고 복도에 정수기도 없어서 난관에 부딪혔다. 프론트엔 아무도 없고, 지하의 주방에 가 봤지만 불도 다 꺼져 있고, 아무리 봐도 공용 오픈 주방이 아니라 주인장이 아침에 손님들 식사 만들어주는 곳이다. 어쩔 수 있나, 어두운 주방에 도둑놈처럼 들어가서 전기포트로 물만 끓여 가져왔다. 나는 왜 돈을 내고 뜨거운 물도 당당히 제공받지 못하는가...
테라플루를 마시고 9시 경 잠에 들었다. 데리고 온 농담곰이 꽤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알차게 잘 챙겨온 집기류도 자랑하고 싶은데 기력이 없어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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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폐인의 날로 명명-
5시에 눈이 반짝 떠졌다. 9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는 삶이라니, 우리 아버지도 아니고 건전하기 그지없다. 비행기에서 하도 잔 탓에 시차적응 랜덤 가챠를 돌리게 되었는데 요행히도 잘 안착해 준 모양이다.
그리고 이 건실한 기상시간이 무색하게도 나는 이 하루를 정말 폐인처럼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핸드폰만 붙잡고 아침 5시에서 오후 4시까지를 버텼다. 4시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순전히 배가 고팠던 탓이다. 어제의 빵은 너무 맛이 없었고, 우유와 시리얼을 먹자니 그릇이 없다. 잠깐 텀블러에 말아 먹을까 생각했지만 설거지조차 어디서 해야 하나 막막했던 나는 일요일에도 문을 열어주는 우리의 글로벌 기업 맥도날드를 찾아 나섰다.
어제는 무슨 입국하자마자 영상 10도에서 동사한 대학원생으로 9시뉴스에 나올 줄 알았는데 오늘은 또 덥다??? 기온은 같은데 아무리 니트 입었기로소니...?
이 동네의 인상은 '정말 넓고 한적하다'. 정식 숙소에서 지하철로 20~30여 분 떨어진 곳으로, 가정집들이 늘어선 주거 구역이다. 길이 워낙 널찍해서 한번 간 길은 도보 30분 거리였음에도 지도 없이 외워서 찾을 수 있었다. 이게 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나의 고국은 어딜 가도 상점가가 미로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던 탓에 거기가 거기 같았는데, 정보값이 적어서 쉬운 건가? 길 잘 찾는 사람은 이런 감각으로 살아왔던 거냐??? 블럭으로 기억하라는 말 암만 들어도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았는데 뭔가 알 것 같았다. 와! 나도 독일에서는 길찾기 천재다!
유명하다는 포르쉐 박물관도 스쳐지나갔다. 관광 구역이라는데 나는 영 관심이 없었다...
키오스크로 칠리 치킨버거를 주문. 버거는 뭐 그냥 그랬다. 맥도날드 요즘 튀김옷 왜 이렇게 딱딱하고 두꺼워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따뜻한 음식에 굶주렸던 나로서는 무언가 갓 만든 음식이 따뜻한 채로 서브된다는 것만으로 몹시 행복했다. 탄단지, 당, 식이섬유, 나트륨, 모두 충족하다니 완벽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청소하시는 중노년 남자분이 뭔가 호탕하게 친절하셔서 웃겼다...반 독어 반 영어라 못 알아들었지만 느낌상:
어이 영수증 가져가! 그건 걍 여기 놔둬! 걍 둬! 땡큐땡큐!
영수증을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 문화인 건지...
하이팻 식사를 하고 나니 존나 행복 온화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산책으로 겨우 마음을 달래던 식사 전과 달리 오는 길은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 마을의 첫인상은 낙엽 냄새가 나는 도시였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잎들의 냄새가 상쾌한 공기에 퍼져 나갔다.
문득 나는 이 도시의 여름도 궁금해졌다.
오는길에 주유소 편의점 열었길래 물도 사왔다.
그러나 한 입 마신 나:
젠장!
탄산수였다니
유럽놈들에게 당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의 세계로 좀비같이 빠져들며 몸과 마음의 체력을 충전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리터럴리 10년 전에 보던 웹툰 HANA를 정주행하고는... 뜬금없이 할리가 너무 좋아서 오타쿠 됨 ㅋㅋ 아 ㅋ ㅋ 젠장~~~ 너무 좋아~~~!!!~!~!!!! 먼 타지까지 와서 집콕하며 오타쿠질 하다니 건전하기 그지없다(반어법). 하지만 행복했죠???
적당히 놀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10시 반에 잠에 들었다.
3일차
계약서 쓰러 학교 간 날
또 6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22시 반에 잤으니 어쩌면 당연한가?
오전 10시까지 사무실로 오랬는데 1시간쯤 여유를 두고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시간은 7:47.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동네의 아침 공기는 시원하고 가라앉아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산 속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이틀 내내 Do not disturb로 일관한 탓에 한 번은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Please make up room으로 바꿔 달고 나왔다. 짐은 정리해서 비싼 건 캐리어 안에 넣어 두고 잠가 두었다. 팁은 줘도 되고 안 줘도 된다고 들었지만, 그냥 5유로 베개 위에 놓고 나왔다.
학교까지 가려면 U bahn을 타고 가야 했다. 오늘은 그럭저럭 KB Pay를 달래는 방법에 적응해서 지하철표 잘 결제했다...^^
그리고 이 앱 엄청 편하다~! 차 타고 가는 와중에도 내 현위치 보여주는 게 너무 좋다.
우반은 이 도시에서 만난 문물 중 가장 호감이었다. 승차감이 무척 매끄럽고, 1분마다 역이 나오고, 통유리인데 관리도 잘 되어 있다. 배차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사실 집과 학교가 거리가 좀 있어서 무척 걱정했는데, 우반이 이렇게 잘 되어 있으면 지연 때문에 지각할 걱정은 없겠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항상 여유시간을 30분쯤 두고 나오자...!
우반 타고 지나가다 이런 것도 봤다. 연못 물고기 공급 업체??? 이런 게 시내 한가운데에 있을 만큼 수요가 있나?
놀랍게도 태권도장도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뭘 본거지...
오만 게 다 있는 슈투트가르트...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독일에 완벽 적응한 모양이었다. 우산 까먹고 나와서 비 그냥 맞았단 소리다. 부슬비가 내리는 역사, 마음에 드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열차, 차창 밖으로 지나는 도시의 풍경,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도움을 주저하지 않는 탑승객들 따위를 머릿속에 담아 두다 깨달았다. 내가 이곳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걸. 첫날은 몹시 우울했으나 난 점점 그라데이션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날씨가 좋았던 것은 첫날뿐이었지만...나쁜 날도 그렇게까지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비가 오는가 하면 다시 갰고, 해가 났다. 아직 가을의 시효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9:07 도착. CityMapper가 알려준 대로 정확히 1시간 20분이 걸렸다. 한 시간 여유 두고 출발했더니 역시나 한 시간이 남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펀쿨섹좌 짤) 비도 오는데 산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앞의 생명과 건물에 무단침입해 구경이나 했다.
여기 와이파이 이름도 eduroam인 거 왤케 웃기지
생명과 건물 돌아다니다 자판기를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뛰어갔는데, 내 돈은 안 먹더라 이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학생증으로만 결제되는 것 같다. 왜...내 마스터카드도 먹어 줘...ㅠㅠ 커피의 부재에 괴로워하며 희망고문당하길 10여 분, 포기하고 건물을 돌아다니며 벽에 걸린 포스터나 읽어 보았다. 수상하리만치 모델링 관련 내용이 많았다.
10분 남기고 사무실에 찾아갔다. 메일을 주고받으며 수십 번 봐 왔던 박사님의 이름이 건물 1층 패널에 적혀 있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와...! 연예인 만나는 기분이다...! 프로젝트 매니저님과 인사하고, 박사님을 소개받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각종 서류와 안내장을 받았다. 모두 좋은 분이어서 다행이다! 박사님이 오피스로 데려와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신 후, 추후 있을 큰 이벤트 일정과 작년 팜플렛도 건네 주셨다.
도합 한 시간 정도가 흐르고 간단한 설명회가 끝나자, 박사님께서는 다른 한국인 만나 봤냐며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다. 같은 프로젝트 다른 부서의 3년차 박사과정 중 한 분이 한국인이시다. 일전에 메일로 소개받아 연락을 하고 있던 나는 그렇잖아도 오늘 인사드릴 예정이었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박사님께 나를 양도(?)받은 언니는 박사과정 4명이 공동 사용 중인 본인 오피스에 데려가 잠깐 휴식을 취하게 해 주었다. 비도 오고 하니 좀 쉬라고. 조금 정신없어하던 차인 인도어 인간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커피도 내려 주셨다...네스프레소 기계 짱이다...무슨 카푸치노 캡슐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ㅠㅠ
언니의 가명은 루키로 지어 주겠다. 루키언니의 가호 아래에서 독일 생활과 학위과정 전반에 대한 대화를 실컷 하며 몸을 녹였다. 시간이 충분히 흐른 듯하자 루키언니는 내 연구실 랩장?에게 나를 인솔해 주었다. 여기저기 인도되는 어린 양이었다...랩장님의 가명은 스마일로 결정됐다. 스마일 형님은 키가 무척 크고 뼈대가 단단한 슬렌더였다. 활기차게 나를 맞아 주고는, 보험, 핸드폰, 계좌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주셨다. 루키언니는 스마일 형님에게 추천인 코드를 받아서 benefit을 받게 해주라고 슬쩍 긔띔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사회생활 선배님...! 그 말대로 했는데 아직 안멜둥 못 해서 계좌는 못 만듦(ㅋㅋ
이후에는 스마일 형님이 나를 (또) 데리고 건물을 돌아다니며 연구실과 사람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셨다. 너무 많은 인사를 해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인터뷰 때 ZOOM으로 만난 몇 분은 기억해서 간신히 good to see you AGAIN을 할 수 있었다.
시설은 하나같이 좋고 깨끗했다. 건물 자체는 조금 좁긴 해도, 익숙한 브랜드의 기기들과 잘 정돈된 기물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침 누군가의 송별회라고 루키언니가 나를 (또222) 데리고 돌아다녀 주었다. 새학기에 학교 소개받는 신입생이 된 것 같아 조금 신선한 기분이었다. ㅋㅋㅋ 피자파티 갔다가 와플파티 갔다가...과장을 보태 아끼바리에 가까운 행위를 하다 왔다. 피자와 과일 요거트와 와플, 커피 두 잔에 샴페인 세 잔. 같이 가던 모르는 선배님이 "We will be permanently eating"이라고 했다. ㅋㅋㅋㅋㅋ ㅋㅋ ㅋ ㅋ
외국에 나가 쭈그러든 사회성을 간신히 발휘해 굉장히 많은 사람에게 인사와 대화를 했지만 워낙 바쁜 장소다보니 제대로 하지는 못 했다. 얼굴만 비추면 됐지 뭐...! 스몰토크 주제로는 보통 내 자취방을 어디에 계약했는지를 묻고는 했는데, 주소를 듣고는 전부 너무 멀다며 놀랐다. 아니...보통 이 정도 통학하는 거 아니야? 놀라는 반응 뒤에 오는 건 하나같이 '아! 옥토버 페스 열리는 곳 옆인데 마침 지금 축제하니까 가면 좋겠다!'였다. 우연이 재미있다. 그러나 전...진심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ㅋㅋ) 한국에서 일관적으로 ENTJ였던 자, 낯선 환경에 떨어지자 10년 전에 죽은 INTP 자아가 되살아나고 마는데...
중국계 언니와 루키언니와 셋이서 옷 쇼핑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다가, 파티가 대강 마무리됨과 함께 해산했다. 루키언니는 이런 날이 잘 없는데 마침 잘 왔다며 본인 일처럼 기뻐해 주셨다. 흑흑! 감사해요 언니! ㅠㅠ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느덧 날이 개어 화창했다. 귤이 표현에 따르면, 햇볕의 질감이 달랐다. 정신없었지만 기분 좋았던 하루를 곱씹으며 우반을 탔다. (기다리는 길에 벌에게 위협받아 분위기를 다 깨긴 했으나...)
숙소 근처는 도시인데 우반을 타고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시골이 된다. ㅋㅋㅋㅋ 농대이니 어쩔 수 없이 외곽에 있을 수밖에.
집 와서 한 일
- 교통권 발급
상술한 대로 우선 일반 정기권 한 달짜리를 끊었다. 서류작업을 할 기운이 난다면 다음달부터는 학생할인도 노려봐야겠다.
- 공보험 신청(나중에 안멜둥 서류랑 계좌 따로 제출할 예정)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링크를 통해 필요 정보를 기입하고 가입했다.
- 사보험 해지 메일 전송
- 학교 이메일 생성 및 activation
사실 피자 파티에서 먹은 샴페인이 과해서 집 와서 침대에 융화되어 있다가 나중에야 졸음을 참으면서 겨우겨우 했다.
9시만 되면 벌써 졸려 죽겠는데 이거 다 하다 보니 11시가 되었다.
내일의 계획은 이사 후 필요한 물품 사 오기, 알디톡 개통. 첫 출근날과 이삿날이 겹칠까 무척 걱정했는데, 요행히도 교수님 출장이 내일까지라 수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하셨다. 다행이다!! 이사만 하면 된다!!!
호텔 체크아웃은 10시이고 입주 약속은 11시였다. 그래서 나는 또 굳이ㅋㅋ 우반을 타고 이사를 하겠다고 9시 반에 나서기로 한다...
원래는 택시를 탈 생각이었는데요 이게 우반 타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그리고 3만원만 되어도 타겠는데 5만원이어서 도저히 타겠다는 결심이 안 섰다. 몰라! 공항에서 여기까지 좃뺑이 잘만 쳤는데 한 번 더 못 치겠나! 그리하여 그런 간단한 계획을 세우고는 잠에 든다.
이것은 사오겠다고 계획 세운 것.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계획이었는지는 추후에 알게 된다...^^
3일차까지 느낀 점:
1. 전차가 길 위에 다닌다. 신기하다!
2. 신호등은 눌러야 바뀌는 게 있다
3. 무단횡단해야 하는 구간이 무척 많다
4. 길빵충의 나라다. 담배 좀 고만 펴라 내 폐가 다 썩겠다...
5. 엄청난 보행자친화적 운전 문화!
5) 예시로, 내가 걷던 곳에서 횡단보도까지 꽤나 거리가 있는 상황에 차 먼저 가라고 멈춰주기까지 했는데도, 모든 차들이 ㄴㄴ님먼저 하며 날 기다려 주었다. 이 정도로 방어운전을 한다고...? 의아할 정도였다.
다른 예시로, 1차선 샛길의 횡단보도 앞에 차가 십여 대는 밀려 있었던 상황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상황이면 보통 보행자가 한 팀 건넌 후 차의 차례가 되면 차들도 한참 빠진 후에 다음 보행자가 건널 기회가 생기는 것이 한국 상식일 텐데, 무려 보행자 한 팀 건너고 차 한 대 지난 후에 다시 보행자의 차례가 왔다. 심지어 내 앞에 걷던 사람들은 마치 거기가 인도의 연장선인 것처럼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를 시전했다. 차를 살펴보지도 않는다...이것이 독일 문화? 뭐 나는 차 없으니까 내게는 잘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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