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10일 전에 교재 사서 한 번 치고, 점수 나온 뒤 3일 더 공부하고 두 번째를 친 사람이 있다...?
후기에 앞서 서두로 변명을 조금 해보고 싶네요...(말줄임표가 굉장히 많은 후기가 되겠군요...)
왜 이딴 미련한 짓을 했느냐 하면요...
1. 그리 높은 점수가 필요하지 않았음
저는 이미 합격해서 일하고 있는 상태이고, 추후 서류처리 및 학적 등록에서 추가적으로 영어점수가 필요해진 경우입니다. 그래서 최저 점수인 90만 맞추면 높든 낮든 상관이 없었어요.
2. 공지를 늦게 받았음
원래 이렇게까지 타이트한 일정일 줄 몰랐는데, 등록 처리가 출장 전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출장계가 나온다는 공지를 불과 서류마감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받아서 그만.
물론 일정 확인은 미리 했어...등록 위원회란 게 정기적으로 있어요...그런데 나는 이 다음 회차 위원회로 등록하면 될 줄 알았는데 계산을 잘못한 거지...위원회 종료 후 발급까지도 시간이 한 달 넘게 걸린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지...
뭐 변명이고요. 제가 박대가리가 아니었다면 공부를 좀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죠. 머리가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
3. 그냥...하기 싫었어요!
민이 왈 보스턴고사리(가명)가 토플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겁을 잔뜩 줬다구! 엉엉! 그렇잖아도 영어스트레스 은은하게 받던 차라 정착기의 낡은 정신건강으로 차마 손대기가 힘들었네요. 물론 그가 필요했던 건 100점이라, 저는 그의 반의반의반만 공부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건 꽤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네.
그런 사유로 당장 10일 뒤에 토플을 보게 된 연일생(특: 아직 교재도 없음).
토플에는 express fee란 게 붙는다는 걸 아시나요?
돈에 미친 세끼들...
돈 아까우니까 여러분은 웬만하면 이런 짓 하지 마십시오...라는 의미없는 권고로 서두를 마무리합니다.
0. 면책 사항
본 글은 단기간에 점수를 올리는 노하우를 제공하지 않으며, 애시당초 자랑할 만한 점수가 아님을 밝힙니다.
이 글은 개인의 경험 기록 및 혹여나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불특정인에게의 심적 위로 제공을 목적으로 합니다.
1. 베이스
오픽 IH 듀오링고 115, 즉 B2 정도의 수준으로, 토플 90에 미묘하게 안 되는 점수입니다. 해외 다녀온 적 없는 토종 한국인! 이제 막 독일 거주 3개월차이긴 하지만, 해외에서 영어로 대화하고 살아도 영어공부를 따로 안 하면 딱히 늘지는 않더라고요? 논문 읽을 땐 중간중간 번역 기능 쓰고, 빠르게 말하면 좀 못 알아듣고, 버벅버벅 하고 싶은 말 하는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 대학원생 수준 같네요. 점점 더 나아지기를...
2. 교재
- Actual test 4권(ebook)
- 유튜브 영상들
- 모의고사*
상기 교재를 사용해 벼락치기를 했습니다. 더 두꺼운 책을 사봤자 못 풀 것 같아서요.
실전을 기준으로 Actual test 교재 난이도를 평가해보자면
- R 진심개어려움 실제로는 이 정도까지 필요 없음
- L 적당. 실전이 더 어려웠던 듯
- SW 토픽 난이도는 비슷해요 ETS의 기습 변주만 아녔다면
그래서 벼락치기용으로 추천할 만합니다.
각각 모의고사가 9회, 6회, 12회, 17회씩 들어 있는데, 준비기간상 다 풀지는 못했고(사실 고등학생 때나 학부생 시절 근성으로는 너끈히 가능한 양인 것 같은데 집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찹쌀떡이 하나 있어서 같이 굴러다니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했고요) 약 6회 정도 풀었던 것 같네요...
SW는 첨삭해줄 선생님이 없다 보니 그냥 시험 방식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20점만 받자는 마음으로...
스피킹의 경우, 인터넷 후기들을 살펴보면 '더듬더듬 말해도 템플릿을 잘 지키면 20 내외로 나온다', '하지만 웬만큼 공부해서는 23 이상으로 올리기 쉽지 않다'라고들 하네요. 그래서 딱 사람처럼만 말할 만큼 준비해 갔습니다.
라이팅의 경우, GPT에 교재가 제공하는 모범답안 학습시킨 다음에 그걸 기준으로 제 답변을 첨삭해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채점 기준이 불명확하다 보니 이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난잡한 문장구조를 매끄럽게 고치는 정도의 도움은 받았습니다. ETS 공식에서 제공하는 채점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니 그걸 사용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실물 한국어 교재를 (당연히)구할 수 없었으므로, yes24에서 판매하는 ebook을 사서 태블릿으로 공부했습니다. 어차피 시험도 컴퓨터로 보니 노트테이킹 할 이면지 정도만 있으면 공부에 지장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모의고사는 하려다 안 했습니다.
꼭 봐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시험 전날까지도 90점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ㅋㅋ) 외면하다 그만... 이 무슨 회피형 행동ㅋㅋㅋㅋㅋ 꼭 보세요...하...시스템 UI가 정말 당황스러웠으니까...
3. 실제 시험 당일(1차)
본래 연일생은 아침형인간이라 오전 오후 시험 중 뭘 선택할지 오래 고민했는데요...늦잠 자고 마음 편하게 치자 해서 오후로 잡았습니다. 시험장은 우반 타고 약 30분. 기웃대고 있으면 같은 수험생 동지가 문을 열어 줍니다.
시험장 구조가 굉장히 독특했는데, 시험장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중앙 복도 역할을 하는 다이닝 룸에 먹을 것이 잔뜩 늘어서 있고, 로비에 문의하면 돈을 내고 먹을 수 있어요. 싱크와 찬장도 있어서 목이 마르면 컵을 꺼내 물도 마실 수 있지요.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살풍경한 시험장을 상상하고 갔는데 웬걸, 수험생들이 다이닝 룸에서 다들 즐겁게 떠들고 있어서 이 시험장이 맞나 잠깐 고민했답니다. 이 녀석들, 영어 잘 하니까 긴장 안 하는구나. 유럽인이 아닌 사람은 저 포함 한두 명밖에 없어 보였어요.
방이 대여섯 개 다이닝 룸에 연결되어 있고, 한 방 안에는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과 데스크톱, 시험용 큰 모니터가 있습니다. 이것도 재미있었는데, 평소에 사무원들이 쓰는 책상인지, 개인 물건과 심지어 메모(...?)들이 자유롭게 늘어서 있더라고요. 토플이란 게 커닝한다고 더 잘 보는 시험도 아니고, 시험관들이 한 번 점검 후 들여보냈을 테니 그리 신경쓰이진 않았지만, 한국의 철저히 말끔한 책상만 보던 사람에게 좀 낯설긴 했네요. ㅋㅋㅋ 오죽하면 스트레스볼도 있었어요. 책상에 물컵을 놨더니 데굴데굴 굴러오길래 아무 생각 없이 주물거리다가 아참, 남의 물건이지 하고 내려놓았네요. 물건 주인 분, 죄송합니다. 제가 시험 당일엔 정신머리가 없어서 그만...
맨 처음 들어가면 토플 치러 왔냐, 여기 앉아서 이거 작성해 달라, 하고 간단한 인적조사와 사인을 하는 용지를 줍니다. 작성 후 앉아서 기다리면 불러요. 그럼 로비의 컴퓨터로 가서, 시험관과 함께 앉아 사진을 찍고 서약서를 제 목소리로 녹음합니다. 서약서는 내가 본인 맞다, 내용 유출 금지, 사전에 본 문제를 볼 시 즉시 시험관에게 고지할 것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 과정 내내 시험관님이 스몰토크 걸어서 약간 재미있고 어이 없었어요. 아니...긴장감 뭐 이렇게 없어...이거 비싼 시험이잖아...나는 날짜도 날짜지만 비용 때문에 살 떨리는데...다 하고 나면 다이닝 룸의 의자나 본인 시험 자리에 앉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모든 컴퓨터에는 미리 시험 프로그램이 켜져 있고, 방금 찍은 수험자 본인 사진이 띄워져 있습니다. 사진 보고 잘 찾아가시면 되겠습니다.
시험시간 직전이 되면 수험자 전원을 다이닝 룸에 모아 공지를 합니다. 내용은 대강:
- 부정행위 및 핸드폰 작동시 퇴실 등 상식적인 얘기
- 화장실 다녀오는 건 언제나 자유이지만, 시험 시스템은 임의로 멈출 수 없으므로, 가능한 듣기 문제 끝나면 가기를 권장
- 백지는 3장, 연필 2자루 제공. 다 쓴 연습지를 옆에 두면 시험관이 돌아다니다가 교체해주겠다고 함.
- 제가 간 시험장은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흑흑.
- 재미있었던 자판 이야기. 독일은 사용하는 자판이 다르단 걸 아시나요? 흔히 쓰는 쿼티에서 y와 z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고, 특수문자 의 배열도 조금 다릅니다. 시험장에는 독일식 키보드도, 미국식 키보드도 있지만, 실제 입력되는 건 동일하게 미국식 자판 기준이라고 공지하더군요. 그러니까 독일식 키보드로는 왼편 Shift 오른쪽에 있는 게 y이지만, y가 적힌 걸 눌러도 실제 컴퓨터에는 z가 입력된다는 소리입니다. 헷갈리니까 독일식 키보드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미국식 자판 사진도 함께 제공해 줬어요.
공지까지 끝나면 다시 자리로 착석. 시험관이 돌아다니며 코드를 입력하면 시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예...시험에 대해 감상을 해보자면...
- R: 문제집 너무 어려워서 울면서 풀었는데 실전은 수능 영어보다도 쉽습니다. 느긋하게 읽고 답지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적당한 시간에 끝났네요. 한국인이면 긴장 안 해도 될 듯
- L: 그냥 제가 근본적으로 약한 파트라서 가늠이 안 됨...설상가상으로 대화형 문제에 늘 나오던 방문 목적/앞으로 할 일 문제도 안 나오고 무슨 이상한 변형 문제가 나와서 식겁했습니다. 무슨 답을 원하는 거지?!
- S: 템플릿 맞춰서 사람처럼만 말했습니다. 조금 버벅거리지만 들어줄 만한 수준.
- W: 독립형 1개 토론형 1개인데 토론형 모범답안을 잘못 알고 있던 바람에 ㅋㅋㅋ 다른 사람 의견 반복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출제 의도와 완전히 다른 구성의 문단을 작성하고 장렬히 전사.
입니다. 흑흑.
시험이 끝나면 결과를 보고할지 버릴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Report 버튼을 두 번 누르시면 됩니다.
마지막 화면에서 R, L 예상 점수와 함께 최종 점수가 나오는 날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미묘한 점수를 받아서...굉장히...불안했고...불안은 현실이 되는데요...
4. 성적 발표 및 2차 시험 신청
이 때 결과 받고 진짜 제정신이 아녔습니다 ㅋ ㅋㅋ ㅋ 아!!! 사실 좀 그럴 것 같았어요!! 10일 만에 90점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고!
머리 싸매고 다시 서류 마감 확인하고...요행히도 공지를 늦게 준 건 위쪽에서도 아는지 서류 마감일을 평소보다 2주 가량 미뤄 주셨더라고요...
하...
어쩌겠니...2차 봐야지...
토플은 3일마다 새로 볼 수 있다는 거 아시나요? ㅋ ㅋㅋㅋ ㅋ... ㅋㅋㅋ 돈에 미친 세끼들...!!!!!!!!!
다행히 한 번 말아먹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와서(나간 건가) 집에서 귀여운 찹쌀떡이 굴러다니든 말든 공부를 하게 되더군요...특히 리스닝 시간에 정말 울고 싶었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리스닝 강좌 몇 시간 들었습니다. 강사를 옮겨 가며. 확실히 노트테이킹이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대화형은 안 하고 듣는 게 제일 잘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강좌의 경우 오히려 메모를 안 하면 머릿속에서 단어 몇 개 붙잡고 있느라 집중을 못 해서, 그냥 뇌를 비우는 용도로 조금만 쓰기로 했습니다. 첫 시험 때 과하게 노트테이킹하느라 몇 장씩 갈아치운 걸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전략을 택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낮은 라이팅 점수에 라이팅 모범답안도 더 많이 검색해 보고...출제 의도와 전혀 다르게 대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왜 난 공부를 이만큼도 안 한 걸까 후회하게 되고...사실 망할 걸 알아서 안 했어요 그래요...'망할 것 같다'와 '망했다' 중에는 명백히 후자가 더 나쁜 건데, 왜 전자는 끝없이 회피하게 되고 후자가 되면 정신을 차리는 걸까요? 인간 뇌의 작동 기작이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돈 너무 아까워서 프로모션 검색해 보니 할인코드가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왜 첫 번째에는 검색해볼 생각을 못 한거야?! 피눈물을 조금이라도 덜 흘리며 결제를 했습니다.
5. 실제 시험 당일(2차)
그렇게 결과 발표 3일 뒤에 또 보게 된 토플.
- 실전을 한 번 쳐 보니 리딩과 리스닝은 확실히 수월했습니다. 특히 리스닝 노트테이킹 습관 바꾸니 훨씬 잘 들리더군요.
- 의외로 말아먹은 건 스피킹. 솔직히 지난번에 버벅거리며 말한 게 21점 나와서 스피킹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ETS가 갑자기 템플릿에 안 맞는 변주를 줄 줄은 몰랐지...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다가 필요한 내용 덜 말하고 끊겼습니다. 망했다!
사실 속도랑 유창성은 이게 더 잘 한 것 같은데, 역시 내용이랑 구조, 분량조절이 중요한가봐요? 하긴 라이팅도 원어민이 껄렁한 말투로 쓰는 것보다 표현이 좀 이상해도 정제된 구조로 아카데믹하게 쓰는 게 점수가 더 높겠죠...당연한 사실을 당황해서 까먹었습니다. - 라이팅은 또 잘 됐습니다. 3일 더 공부한 보람이 있다! 찢었다(내 실력 한도 내에서) 생각하며 결과 제출했죠.
결과, 리딩 28 리스닝 21.
최종 점수 나오는 날짜, 다음 금요일.
스피킹은 전보다 못했고, 라이팅은 찢었으니, 각각 19, 22만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6. 2차 성적 발표
전날까지 하루에 10번 들어가보다가 결과 확인하고는 "아, 거지 같은 시험, 드디어 때려친다" 외치고 핸드폰 집어던졌습니다.
다시 봐도 아찔하군... 90점 커트라인에 90점 맞춰 가는 미친 무빙...
1점만 적었으면 3회차 칠 뻔했네... 아니 3회차 못 쳤을 수도... 출장 나만 못 갔을 수도... (그것도 독일에서 공부한다는 놈이 영어성적이 모자라다는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아주 그냥 모골이 송연합니다.
뭐 아무튼 해냈고요...90점은 사실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영어 얘기가 아니라 그냥 공부 전반) 사이에서는 그리 힘든 점수가 아니라고 하니 어떻게든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ㅠㅠ 저는 정말 ㅠ 멍청하게 공부하고 멍청하게 쳤지만 ㅠㅠㅠ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부디 좀 더 스마트한 대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
(해외살이를 오래 하신 분들이나 영어 네이티브가 아니라면) 한국인에게 영어란 평생 안고 갈 애증의 관계이죠...
모두들 원하시는 성적 잘 받으시길 바라며 엉망진창 벼락치기 후기를 마칩니다.
C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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