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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포트폴리오/무연고 근무기

4일차~6일차: 이사, 출근, 휴식

by 연일생 2024. 10. 4.

4일차

이사와 물건 갖추기

가자! 담곰아!

 
8시 기상, 샤워, 짐 정리 후 계획했던 대로 9시 반에 집을 정리하고 나왔다. 빵과 하몽이 조금씩 남았지만 딱딱해져서 그냥 유기하고 나왔다...^^ 5유로의 팁으로 무마되었기를 바라며...
 

 
잘 지내다 갑니다, 처음 독일에 머무른 동네. 가는 길에야 한식집이 있었다는 걸 발견해서 좀 웃겼다. 귤이 독일 교환학생 갔을 때 한국에 있는 나보다 한식 더 많이 먹길래 웃었는데, 지금에야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 같아도 이 딱딱빵들 사이에서 우거지국밥 같은 거 있으면 당장 달려가서 2만원에 사 먹겠다.
 
사실 제가 독일 출국 전까지 극한의 빵주기를 달렸는데요...그 정도는 평생 밥>면>빵이던 연일생의 탄수화물 서열을 단번에 제치고 빵>밥>면으로 재배치되기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내가 독일 가서 빵만 뜯고 잘 살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개 맛없는 딱딱치아바타 3일 먹고 나니까 빵이라곤 학을 떼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다...조금이라도 부드러워 보이는 우유빵 같은 게 있으면 사오려고 눈에 불을 켜고 마트를 뒤져 봤는데, 얘네는 빵을 부드럽게 굽는다는 개념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이건 차후의 이야기이고.
 
우반 1번 환승해서 숙소까지 이동하는 길은 의외로 스무스했다. 높은 계단도 없고, 어려운 구간도 없고. 캐리어 들어올리는 데 무릎을 같이 써서 무릎 표면이 조금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와! 돈 굳었다! 다만 가는 길 내내 길거리 담배에 조금 고통받기는 했다. 나는 아직 독일이 어떤 것에 엄격하고 어떤 것에 너그러운지 도통 모르겠다.
 

 
새 동네는 가는 길이 무척 예뻤다. 사진 찍는 재미가 있는 도시이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학교에서 우반으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으로, 여행 계획 짜기가 취미인 민이가 단련된 안목으로 찾아다 준 것이다. 좀 멀긴 해도, 예약이 체계화되어 있고, 여러 군데 지점이 있는 인기 프랜차이즈이고, 인터넷으로 모든 과정이 완료된다는 점에서 날 매료시켰다. 게다가 시내 중심가이고, 넓고, 개인실이고, 신축이고, 주방과 화장실도 개별 방 안에 있고, 시큐리티 있는 공동 주택이기까지? 멀다는 것만 빼면 최상이었다. 월세(800유로)도 슈투트가르트 평균 방세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그전까지 20여 개의 집 계약 요청 메일이 좌절당한 점도 한몫했다.
 
체크인 시간까지 40분 여유를 두고 나왔더니 역시나 40분이 남아서(ㅋㅋ) 약속 시간까지 밖에서 대기하다 들어갔는데, 정작 로비에 사람이 없었다ㅋㅋ 아ㅋㅋ 걍 들어가서 기다릴걸! 괜히 춥고 수상하기만 했네! 십여 분을 기다리다, 적혀 있는 연락처로 '도착했는데 여기서 기다리면 되냐'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또 뭔가 국제번호의 오류로 메시지 전송이 안 되어서 해메던 시점에 관리자분이 도착하셨다. 관리자분은 내 이름과 여권을 확인하시고는 한참 서류작업을 하고, 나를 직접 방까지 인솔해 주셨다.
가는 길에 다른 관리자 한 분과 뭔가 말씀을 나누시다가 2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우고는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의 방을 열어 보시는데 ㅋㅋㅋ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진 청소도구가 짜잔, 나타났다. 그분들은 절대 의도하지 않으셨겠지만, 그 방과 엘리베이터의 위치가 공교롭게도 내게는 나를 위한 마술쇼처럼 연출되어서 ㅋㅋㅋㅋ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두 분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절레절레하더니, 독일어로 몇 마디를 나누시고는 다시 갈라서서 나를 인솔하러 오셨다. 독일어 못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얘네 미친 거 아니냐?" 다시 층수를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이셔서 must be so busy...라고 말씀드렸더니 갑자기 '아니, 잊어버려. 난 원래 매니저이고 내 일도 아니고 저거 따로 청소업체한테 맡긴 건데, 저래놓고 갔어. 미친 게 분명해...아무튼 잊어버려.'라고 넋두리를 하셨다.
 
방 열쇠와 안멜둥 시 필요한 서류, 인터넷 접속 방법이 적힌 전단과 안내문 한 장을 전해주시고 관리자분은 다음 체크인을 위해 돌아가셨다.
 

너무 좋아서 사진도 좀 크게 붙여 봤다.

 
방에 짐을 놓고, 무거웠던 백팩과 힙색까지 내려놓은 후, 즉시 민이에게 '민씨, 그레잇감사, 이 은혜 잊지 않으리'라고 카톡을 보냈다. 숙소는 너무 좋았다!!!!!!!!!!!!!!!!1
야호!!!!!!!!!!11
전날까지 화장실코어(ㅋㅋ)에서 살다 온 나에게 넓고 쾌적하고 햇볕이 잘 드는 집은 그간의 피로를 싸악 녹여주는 멋진 선물이었다. 어머니가 다른 데에는 비용을 좀 아껴도 집은 좋은 걸로 고르라더니, 엄마 말 듣길 잘 했다. 이 집의 설립자와 관리자, 내가 이 집을 선택하게 되기까지 영향을 미친 민이, 어머니, 그리고 각종 신과 부처와 조상님께 다시 한 번 그레잇 감사를 올렸다. 일단 엄청나게 넓고 깨끗했고, 유리가 통창이라 햇볕이 환하게 들었으며, 환기도 잘 되어 보였던 점이 최고. 창문 넓은 집은 정말 최고야... 게다가 저 창 위로도 옆으로도 열리는 창이다. 날씨에 맞게 열 수 있다. 너무 멋지다. ㅠㅠㅠ
 
방이 그냥 크고, 창문도 크고, 옷장도 크고, 침대도 개 크고, 책상도 크고, 수납장도 크고, 티비도 있고 네스프레소 기계까지?! 민이의 평으로는 '서너 명은 자겠다'. 대한민국 원룸에서 살던 사람에게는 과할 정도로 모든 게 컸다. 물론 대한민국 원룸도 월 100만 원을 주면 이 정도 크기를 줄 것 같긴 하다??? 원룸 살 때에는 좁아도 별로 안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큰 집으로 이사갈 때마다 '나는 사실 불편했구나, 이게 훨씬 좋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껄껄.
 

 
각각 싱크대+냉장고와 옷장, 붙박이 거울. 민이한테 이 사진 보냈더니 '포즈는 왜...'라고 해서 깔깔 웃었다. 바로 민이에게 영상통화로 집 투어를 시켜 주었다. 멋지다...
 

 
집 크기에 비해 화장실이 좁은 건 좀 의문이지만, 깔끔하고 있을 것 다 있으니 상관없다. 그리고 저 샤워부스가 너무 좋다. 건식 화장실 최고 깔끔하다. 한국식 습식 화장실에 익숙한 나로서는 인테리어 좀 한다는 사람들이 왜 죄다 건식 화장실을 만드려는지 도통 알 수 없었는데...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능만 하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세면대는 사진상 문에 가려져 있는데, 샤워부스의 오른쪽에 있다.)
옵션을 보고 이 방을 선택한 건 아니고, 그냥 외장하드 고르는 원리로 조금만 더 주면 쑥쑥 넓어지길래 이 크기까지 온 건데, 큼지막한 TV랑 네스프레소가 딸려 있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다.
 

 
그대로 빵떡이, 엄마, 오빠에게 각각 영상통화를 돌리고 방 투어도 시켜 주었다. 좋은 집에 잘 입주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적당히 짐을 풀어 옷장 및 수납장에 배분해 넣었다. 누워있다 체력이 좀 회복되자 근처의 ALDI 마트로 향했다. 오늘은 핸드폰을 개통하고 싶었기 때문.  첫날에 간 알디는 작으니 알디톡이 없었던 거겠거니, 하며 야심찬 쇼핑 계획을 세우는데...내가 사겠다고 적은 항목들은 아래와 같았다.
 
[가위 식칼 브리타 베개 그릇 주방세제 수세미 햇반 라면 냄비 휴지 계란 간장 소금, 알디톡]
 

 
독일에 살게 되면 도보로 왕복 40~50분 거리 정도는 가볍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기묘한 점이다.
가는 길 또 정신없이 찰칵찰칵. 찍는 곳마다 예술이다. 놀이터를 보자마자 흥분해 뛰어들어갔는데 내가 탈 만한 건 없더라...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현지인 두 분의 시선을 머쓱하게 피하며 되돌아 나왔다.
 

 
그리고 알디마트를 다섯 바퀴 돌았는데요......................
한국인이라면 무릇 마트에 휴지가 없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잖아요?
무슨 마트가 냄비도, 수세미도, 가위도, 휴지도, 주방세제, 수건도, 그릇도, 드라이기도 없담? 작은 마트면 이해하겠는데 심지어 크기도 꽤 큰 필할인마트 정도의 크기였다. 그럼 그 공간을 뭐가 채우고 있나요? :하리보 100종과 초콜릿 200종, 호밀빵 50종과 가공육 500종, 파스타 300종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알디톡 스타터 팩만 사서 나오고 만다...다른 건 몰라도 라면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절망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어제부터 라면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빠가 끓여준 뜨끈 꼬들한 국물라면이 먹고 싶단 말이다!!! 오빠!! 보고 싶어!!! (정확히는 끓여 준 라면이!!!!)
 

https://m.blog.naver.com/ppmbc0304/222352889444

 
내가 이 블로그를 왜 좀 더 빨리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오죽하면 너무 답답해서 <독일 휴지 파는 곳>이라고 검색한 결과였다.
하...
내게 가장 급한 건 라면이었으므로(ㅋㅋ) 일단 REWE에 들러 보았다. REWE에서는 다행히 신라면 컵과 순라면 봉지를 구할 수 있었다! 신라면 봉지가 있었다면 그걸 샀겠지만 슬프게도 그건 품절이었다. 라면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의 위안을 얻고 두세 개씩 사재기해 두었다. 물과 음료까지 사자 가방이 꽤 묵직해졌으므로 집에 한 번 들러 짐을 푼 후 다시 다음 가게로 향했다.
 

 
시내로 좀 더 걸어 유로샵과 테디에서 사혼의 구슬조각 모으기를 했다...유로샵은 말 그대로 천원샵. 그릇, 수세미, 다소 조잡한 슬리퍼와 옷걸이, 가위를 살 수 있었다. 테디는 집기류 계열의 종합마트인 모양인데, 이 지점은 좀 작아서 품목이 그리 다양하진 않았다. 냄비와 커다란 담요를 사 왔다. 이쯤되니 심신이 좀 고달팠다...왜 내겐 쿠팡과 오늘의집과 다이소와 이마트가 없는 거지? 돌아와 그대 내게 돌아와 나 항상 그대 생각뿐인데
 

 
점심은 기력이 쇠해 버거킹에서.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이 가게 구글맵 평판이 난리도 아니더라 ㅋㅋㅋㅋ
난 별 생각 없이 먹었는데 주로 긴 기다림 시간, 비위생적임, 음식이 차가움을 이유로 꼽았다. 다른 건 몰라도 비위생적이라면 다시 안 가야지.
 
실컷 장 다 봐 놓고 버거킹 주문하다가 손에 힘이 풀려 장바구니를 놓쳤는데...그릇과 컵이 ^^ 와장창 박살이 났다. 이걸 어쩌나.
다행히 장바구니 내에서 담요와 그릇 사이는 옷걸이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불까지 못쓰게 되진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따뜻한 고열량 음식을 공급받자 다행히도 힘이 났다, 언제나처럼. 연일생의 소울푸드는 역시 아빠가 해 준 김밥, 엄마가 해 준 갈치조림, 오빠가 끓여준 라면 그리고 햄버거이다.
 
버거킹 내부와 오는 길 내내 민이와 통화 및 음성메시지를 열심히 주고받으며...
 

 

 
깨진 그릇이 영 안타깝다. 흑흑!
 

 
그래서 이 사오려고 했던 것들 중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었구요...한국 음식은 와이마트와 한독몰에서, 급하지 않고 부피가 큰 것들은 쉬인에서 배송하기로 했다. 예시로는 신발장이나 빨래를 모아두는 큰 망 같은 것. 중순에야 도착한다는군...
 

 
그리고 이거 다시보니 삼성이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머나먼 땅에서 본 고국의 향기...유럽에서도 종종 보인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술하겠지만 내 컴퓨터 세팅해 준 정보전산원 사람도 삼성파냐 엘지파냐 묻더군...그들은 필드가 다르다고, 스마트 기기는 삼성 백색가전은 엘지라고 말해 줬다.
쇼핑 후 빵떡이와 2차 통화를 하며 TV 구경도 시켜 줬다. 자체적으로 넷플릭스 기능이 있는 스마트TV였지만, 뭔가 인터넷과 계정이 꼬여서 그냥 내 태블릿과 화면공유를 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래서 태블릿 화면공유를 성공한 후로는 흑백요리사를 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행복하다! 너무너무 쾌적하다! 흑백요리사 너무 재밌다!!! ㅋㅋㅋㅋㅋㅋㅋ 이전까지도 등장하는 음식들 죄다 먹고 싶기는 했지만, 편의점 편은 재료의 접근성이 낮아서 그런지 특히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건 나도 해보고 싶다. 뱀발인데 최강록 왜...고추꽁치를 발음을 못 하는 거야 ㅋㅋㅋㅠㅠㅠㅠ 고추참치, 예, 그것처럼 꼬 추 꽁치. 고추기름에 재운. 근데 이제 고추기름이 없으니까, 고추참치의 고추기름을 사용한. (???)
 
베개가 없어서 민이가 선물해준 목베개를 다시금 소환했다. 가운데에 갈색 담요 돌돌 말아 끼우고, 새로 사 온 회색 담요를 덮으니 그럭저럭 잘 만은 해졌다. 평소라면 포장되어 있지 않았던 담요를 빨래도 하지 않고 덮기는 망설여졌겠지만, 알 게 뭐람! 쇼핑에서 2차 좃뺑이를 친 나로서는 모든 것에 무감각해진 지 오래, '있기만 하면 감지덕지다' 마인드였다. 독일 와서 제일 많이 쓴 단어 좃뺑이인 것 같다. 다소 상스러운 어휘이나 이것 말고는 내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라면을 끓여 먹고 잠에 들었다. 강제 시차적응에 의해 9시쯤 되면 절로 잠이 왔다. 바른 생활 어린이여...

 

5일차

첫 출근한 날!
 

 
첫날이니 8시 반 도착을 목표로, 거기서 여유시간을 더 두고 출발하기로 했다. 5:50기상이 목표였는데 거의 4시반에 깼다. 추워서 와들와들 떨면서 라디에이터를 보니 지멋대로 꺼진 모양이었다. 뭐지?! 호달달 떨다가 가지고 온 핫팩을 하나 터뜨려 그걸 껴안고 새우잠을 청했다. 핫팩 가져오라고 한 사람 누구냐? 목숨을 빚졌습니다 절 받으십시오. [캐리어에 챙기기 잘 한 항목]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이건 나중에 별도 포스팅으로 올릴 수 있기를 바라며...
6:50 출발. 방 안에서 이미 추위를 맛봤기 때문에 최대한 따뜻하게 챙겨 입었다.
 

 
출근길, 비가 추적추적 많이도 왔다. 독일 사람들 비 와도 우산 잘 안 쓰고, 대개 우산을 안 쓸 만큼의 가랑비만 온다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바가 있기에 그냥 나왔는데...나 말고 우산 다 쓰고 있더라. 아놔! 뻥이잖아요! 사실 '나 말고 다'는 아니고 절반 정도였다. 그러나 남은 절반도 별로 비에 덤덤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 숙이고 열심히 피하고 있더라. 그래 이건 그냥 맞기에는 강수량이 지나치게 많았다. 슈투트가르트의 가을비는 빗자루로 안 가려진다. 기껏 캐리어에 담아와 놓고 현관에 버려둔 단우산이 지독하게 그리웠다.
 
시간 여유는 꽤 두고 나왔는데 막판에 도보길을 헤매어 정신없이 비를 맞으며 만신창이가 되어 출근했다...ㅋㅋㅋ 첫날부터 물에 빠진 생쥐로 출근하는 처지가 좀 웃기고 슬펐다. 부러 말끔한 셔츠에 코트 입었는데. 엉엉.
 

 

8시 반에 도착하자 교수님과 동시에 오피스 앞에서 만났다. 책상을 받고 짐을 내리고 있으니 교수님께서 업무용 노트북을 가져다 주셨다. 웹메일 가입했는지 확인하신 후, 프로그램 동기화 및 계정 연결을 몇 개 하고는 정보전산원에서 사람을 불러 주셨다. 소프트웨어 세팅해 준다고. 그거 나한테 시키는 거 아니고 누가 해 주는 거야?!!? 업무용 노트북 제공부터 전산원 사람까지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하긴 실험 데이터 같은 건 대외비니까, 내가 함부로 빼가면 안 되니 노트북을 주긴 하겠지 일반적으로.
정보전산원 사람은 키가 크고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전형적인 엔지니어 상이셨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스몰톡으로 삼성파냐 엘지파냐 물었다. 걔들은 필드가 달라요. 한국인은 이름에 뜻이 있다던데 뭐냐 묻기도 했고, 요즘 시간 비면 웹툰을 본다고도 했다. 뭘 좋아하냐고 하니 신의탑 본댄다...세상이 구라같다. 신의탑 보는 독일 연구실 엔지니어??? 내가 지어낸 거 아니고? ㅋㅋㅋ
 

기기 세팅 이후, 다른 신입 두 명과 함께 옆 방 교수님께 연구실 안전교육을 받았다. 안전교육이 무척 체계적이어서 놀랐고, 안전관리 자체도 구조화되어 있어 두 번 놀랐다. 안전교육만 들어도 이 학교와 연구실에 대한 신뢰가 수직상승하는 느낌이었다. 파격적인 내용도 몇 개 있었는데, 일하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다친 것도 산재로 쳐 준다는 것과, 임신하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라고, 일과 삶의 적정선을 논의하고 함께 찾아보겠다는 말도 하셨다. 실험 장갑을 2시간마다 매번 교체하라고도 하셨다. 우리는 에코프렌들리를 지향하지만 안전에 있어서까지 그걸 적용하지는 않는다면서...장갑도 다루는 용액별로 대여섯 종류가 구비되어 있는데, 용액이 있는 선반 위마다 그에 맞는 장갑을 올려 놓는다고 한다. 비상구와 화재 대피 요령도 꽤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인상적이었던 말은 "히어로가 되려 하지 마라. 그냥 도망치고 비상 연락망으로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해라."였다. 이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망칠 수 있으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건 모든 연구실에서 공통으로 가르치는 1수칙인 듯하다.
 
이후에는 할 일이 없어져서 다시 지도교수님께 보고를 하러 문 앞에 서 있었다. 먼저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던 이란 사람(곧 졸업하신다는 듯)이랑 스몰톡을 했는데...서울FC 팬이란다??? 아니, 이란 분이 왜 축구팀 유명한 슈투트가르트까지 와서 서울FC를 응원하시는 거죠? 심지어 드라마 주몽도 봤다고 하고, 여동생 분이 Kpop의 빅 팬이라고도 하셨다. BTS 좋아한다고.
예전에 인터넷 밈으로 k-pop 국뽕이 많이 돌아다녔고, 한 차례 분기가 지나자 이번에는 '우리 k-pop 그 정도는 아닙니다, 너드들이나 좋아하는 겁니다'로 방향이 바뀌었는데, 놀랍게도 아직 국뽕의 시효가 남아있나 보다. 정작 난 주몽 안 봤는데! 아이돌도 잘 모르는데! 고마워요! 나는 송구하게도 이란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유명한 이란 배우 소개해 달라고 했다. 대표작인 Intoxicated by Love를 알아 왔다. 나중에 꼭 볼게요...그렇게 쌓인 컨텐츠 채무가 몇백 시간치에 이르고 마는데...
 

 
이 건물은 지하와 1층, 2층이 있었는데, 2층에는 두 개의 작은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복도에는 서너 개의 오피스와 한두 개의 실험실, 두 개의 교수님 방이 있다. 아마 이 건물 전체를 department라고 하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 department는 단대 개념이었던 반면 여기서는 좀 더 과 개념에 가깝다. 내 오피스는 네 명과 함께 쓰고, 아마 이 넷이 우리 지도교수님 소속. 각 연구실이 완전히 분리된 느낌은 아니었고, 우리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두 교수님께 공동 관리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도교수님은 명확히 정해져 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 복도 열댓 명의 국적이 전부 다르다는 것. 교수님...모으고 계신 거 아니야? 좀 우스갯소리로 농담했다.
 
그래서 같은 복도 사람들끼리 다같이 점심 식사. 구내식당은 학생증이 있어야 지불할 수 있었으므로, 아직 수령 전인 내 점심은 같은 연구실의 타이완인 언니가 사 주셨다. 가명은 미소언니로 지어 주겠다.
 
미소: 이거 어때 맛있어?
일생: 뭐 그럭저럭이요
미소: 진심???
일생: ㅋㅋ 친구들도 전부 제 맛의 기준이 낮다고 하더라고요, generous하다고들 했어요
미소: 아 그럼 적응 잘 할거다. ㅋㅋ 난 아직도 여기 음식 맛대가리 없어서 못 먹어주겠다.
 
사실 그리 맛있진 않았고, 그냥 간장 맛? 하지만 허접 스테이크에 간장 파스타면 내게는 나름대로 훌륭했다.
 
밥 먹고 자리로 돌아오자 왠지 20여 분 곯아떨어져 버렸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고, 통창을 통해 햇볕이 자리로 내리쬐고. 꾸벅꾸벅 졸다가 교수님께 설치가 마무리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돌아가서 개인 업무를 봐도 좋다고 하셨다. 살 거 사고 폰 개통하고 서류처리 같은 거 하라고.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공휴일이며(통일절. 한국의 개천절과 같은 날인 게 재미있다.) 금요일엔 아무도 없으니까 다음 주 월요일부터 와도 된다고도 알려 주셨다. 맙소사... 나는 깊은 감동을 받은 채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더 남아서 잡스러운 세팅을 하고 나니 교수님은 어딘가로 가고 안 계셨다. 상쾌한 퇴근이다!
 

 
아름다운 퇴근길. 3시 퇴근이라서 더욱 아름답다 (ㅋㅋ)
짐을 놓은 뒤 다시 살 것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오늘은 꼭 롤휴지도 사고 설거지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ㅋㅋㅋㅋ...
 
뭐랄까...자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 자취 3년차의 관록은 사실 템빨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오늘부터 나는 다시 자취 초년생(?) 이다...근데 이제 오늘의집이랑 쿠팡이 없는. 이마트가 사혼의 유리조각처럼 갈라져서 밥 휴지 이불 그릇 냄비 헤어드라이기를 죄다 다른 데서 사야 하는... 그런 자취 초년생. 내 힘들다!
 

 
도보 거리에 있는 밀크티 집. 언젠가 사먹으리라 결심하며...
 
집에서 좀 걸으면 CARRÉ라는 종합 플라자가 나온다. Kaufland에 집기류를 사러 간 건데, 우연히 들어간 Action에서도 쓸 만한 물건들을 꽤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Action이 조금 다이소 같은 느낌이라, 품질이 중요하지 않은 건 웬만하면 거기서 사는 걸 추천한다고. 가격이 꽤 저렴했다.
짐이 하나같이 크고 무거운 것들이었기 때문에 집과 CARRÉ 사이를 세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냥 진열된 걸 보는 게 기분 좋아서 찍음

 
이건 Kaufland에서 팔던 거. 나중에 가격 비교해서 사려고 사진만 찍어 왔다.

 
Kaufland와 Action에서는 이런 걸 샀다. 정말 급한 것들 위주라 좀 재미있다.
휴지, 브리타, 주방세제, 휴대용 티슈, 물티슈, 밀대, 베개, 헤어드라이기(얘는 다른 데서 삼), 전기담요, 그릇, 시리얼볼, 컵, 수건 2장.
 
특히 Action에서 전기 담요를 팔아줘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샀다. 그래 인터넷에서 봤어 이거. 한국 전기장판 같은 개념은 아니고 약간 얇은데다 살짝 작지만, 내 한 몸 뉘이긴 충분하다. 3시간 auto off인 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고...이거 때문에 한동안 한밤중에 깨서 다시 켜고 잤다. ㅋㅋ ㅠㅠㅠ
 

이것들도 필요할 때 되면 여기서 사가리라...

 
헤어드라이기는 위의 두 가게에서도 구할 수 없었기에 로스만Rossman에 왔다. 고생 끝에 발견했을 때에는 어찌나 반갑던지... 와! 드디어 자연건조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ㅠㅠㅠㅠ 로스만은 약간 올리브영의 개념이었다.
 

 
마지막으로 Kaufland 한 번 더! 집기류는 대충 급한 걸 샀으니 이제 우유와 간식거리를 좀 사고 싶었다. 가는 김에 세면도구 겸사겸사. 여태까지는 작은 여행용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아까 구경한 바로는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내 취향의 것으로 골라오고 싶은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수없이 진열된 상품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샴푸, 핸드워시, 바디워시를 고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린스는 필요하면 사오기로! 물이 달라서 그런지 머리 감을 때마다 머리가 미친 듯이 뻑뻑해지던데, 과연 이 물에 맞추어 만들어진 샴푸 제품을 써도 똑같을 것인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다. 괜찮으면 린스 없이 그냥 쓴다!
 

 
저녁은 정성들이고 싶지 않아서 대충 때웠다. 독일 우유는 꽤 고소하다. 뒷배경이 다소 어지러운 것은 이사 둘쨋날이니 봐주시라.
이 날도 아마 10시~10시 반쯤 잤을 거다. 놀랍게도 이거, 여기 기준으로 꽤 늦은 취침 시간이다.
 

6일차

개백수Day

 
전기요의 가호를 받아 첫 늦잠(11:30)을 자는 데 성공했다. 전기요를 사고 나의 꿀잠시대 시작됐다~~!

너무 이상한 게, 반팔을 입을 때와 긴팔을 입을 때의 추움 편차가 너무 크다. 한국에서는 긴 옷을 입으면 따뜻함이 +5 된다고 쳤을 때, 여기서는 +20 되는 느낌이다. 뒤지게 추웠는데 긴 옷 입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원래 잘 때는 얇게 입는 걸 좋아해서 잠옷용으로 반팔 반바지만 가져왔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날씨라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춥긴 엄청 추운데 한창이던 환절기 비염은 또 3일차에 싸악 완치되어 신기하다. 이것이 알러겐 없는 청정 공기인가...?
 

 
아침과 후식.
원래는 초코를 그닥 안 좋아하는데 이곳은 초코의 나라라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과자가 젤리거나, 감자칩이거나, 초코과자다.
 

 
집에서 빈둥거리다 프세카를...리듬게임을 하고 싶어서 최근에 시작한 게임이다. 보카로 추팔도 겸사겸사 하고 재밌다.
옛날 취향은 모르겠고 지금 취향에 맞는 작곡가는: 누유리, 기가p, 나부나, 지저스p.
그리고 카아이 유키 노래랑 굿바이 선언, 베놈을 좋아한다. 베놈은 정말...카이리키베어 올타임레전드다...
 
다시 말하지만 독일의 공휴일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게도, 식당도, 심지어 무인 코인 세탁소도 문을 닫는다. 나는 하루종일 빈둥대며 이 강제적 휴식을 만끽하는 수밖에 없었다. 길게 말했지만 핸드폰과 함께하는 개백수 같은 하루를 보냈다는 의미이다. 아! 얼마만이냐! 눈코 뜰 새 없던 입국 이후로부터 간만에 길게 가져보는 휴식시간이었다. 이 하루의 휴식은 재정비와 몸살 방지에 무척 큰 도움을 주었다.
 

 
인스타 올린 것들~ 원래 경사를 자랑하지 않는 성격이라 독일 생활 초반에는 잘 안 올리려 했는데, 내가 뭐 아이비리그 합격한 것도 아니고*, 정 선배가 자주 올려달라고도 했고, 무엇보다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안 올릴 수가 없었다.
 
*학벌이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남들 보기에 부러울 자랑거리인가 하면 그건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자랑보다는 일상 보고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의미.
 
마지막 사진 올리고 독어독문 키위랑 귤이가 디엠 와서 웃겼음 ㅋㅋㅋㅋ 하지만 그도 그럴 게 강수량 히트맵을 보면...
 


 
 
 
6일차까지 느낀 점:
1. 거리에 개가 정말 많다! 대중교통에도 별 거부감 없이 잘 드나든다. 한편 개를 이 정도로 인생의 친구로 여기니까 인종차별 레퍼토리로 개고기를 쓸 수 있는 거구나 싶다...
2. 휠체어도 많고 유모차도, 아기도 많다. 그리고 아이들 비명에 정말 관대하다ㅋㅋㅋ 어디에서나 익룡이 있다. 대중교통이나 관공서 등에서는 대부분 조용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듯하나, 식당가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놀게 두신다. 좋은 일이다. 어머니께서는 늘 아이들 소리가 있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3. 유럽이라 그래도 소매치기 걱정 좀 했는데, 적어도 슈투트가르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서로의 것에 정말 한치의 관심도 없다. 물론 한국처럼 식당 테이블에 물건 두고 다니는 건 지양해야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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