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2회차 도서


1장 기대에 대하여
평소에 인문학을 접할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입문이 좀 힘들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비관적인 글을 좀 안 좋아한다. 형이상학적인데, 비관적이기까지?! 하지만 맨 첫 장에 겨울 와서 몹시 우울해하는 모습이 공감되어서 웃겼고(서유럽 겨울 진짜 최악), 우리는 흔히 취사선택한 정보만을 기대하므로 망각으로 갈무리된 기억을 조금 더 좋아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했다. 어떤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느끼는 행복은 10분 이상 지속되기 힘들다는 주장도 일부는 동의한다.
동의함과 별개로 글이 너무 염세적이어서 혼자 읽었으면 여기서 하차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장의 논조가 곧 나머지 장의 태도로 일관되는 것은 아니며, 점층적으로 여행의 의미를 긍정하는 전개를 의도했던 것 같다. 억지로라도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독서모임의 순기능이 잘 작동한 셈이다.
2장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 하며,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1장과 같은 맥락. 일부 동의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 행복하리라 막연히 기대했다 실망한 역사도 짧지 않기에(그래서 나는 성인 직후에는 여행보다 호캉스를 선호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여행을 가도 그 의미를 찾고 행복해하기 때문에 이 주장이 좀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런 행복과 노력의 부정처럼 들려서. 다만 후술되는 장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기차에서는 평소에 오래 지속할 수 없던 영감과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른다는 구절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 장거리 비행을 꽤 좋아한다. 비행기에서 글 작업하거나 책 읽는 게 좋으므로. 이 독후감도 비행기에서 썼다. 심지어 나는 전철 통학도 좋아한다. 독일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우반을 택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통학 시간이 길다며 여러 대체재들을 소개해 주고는 하지만, 나는 아침 저녁으로 우반에 앉아 공상하는 시간을 정말로 좋아해서 이 집에서 1년 계약을 꽉 채울 생각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휴게소는 도시에 속한 것도 아니고 시골에 속한 것도 아니며, 어떤 제 3의 영역에 속한 것 같다는 대목도 좋았다. 그런 이유로 휴게소를 좋아한다. 활기차고 고립된 느낌.
민이가 호퍼의 그림을 컬러로 보면 훨씬 좋다기에 찾아봤는데, 그 고독하면서 청승맞지 않은 느낌이 확 와닿았다. 아니 저자가 이렇게 긴 문장으로 색채에 대한 찬사를 보냈는데 이 책에 들어가는 모든 삽화를 흑백으로 하겠다는 결정을 한 편집자는 누구일까?
3장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하나가 웬 미친 놈을 다 본다며 악담 악담을...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 만한 게 오리엔탈리즘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정신적 이집트인이라니 이게 무슨? 작가도 그런 면을 모르지 않아 나름 변호를 해 뒀지만 읽는 아시안 입장에서 좀 기괴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덮어놓고 욕하지 못한 이유는 독일의 정서가 내가 고국에서 느끼던 결핍과 채우지 못한 욕구를 일부 충족해주었기 때문. 나는...바덴 뷔르템베르크의 환경주의와 기계적이기라도 한 다양성 존중에 위로를 좀 많이 받았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간판의 스펠링에 A가 두 번 오는 것에, 색깔과 글씨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이국적임을 느낀다는 게 좋았다. "플러그 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나는 정확히 이런 이유로 해외여행을 좋아하고, 해외에서 관광명소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오히려 숙소에 묵고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상가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선호한다. (작가의 표현을 반복하자면)플러그,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과 안내판에 일일히 감동하며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이유를 검색해 보는 걸 무척 좋아한다.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작은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민이가 고정관념 사전이 재미있다고 했는데...나도 처음에는 무척 흥미로웠으나, 갈수록 이게 이 고정관념에 반대해서 풍자하는 건지 냉소적으로 동조하는 건지 헷갈려서 판단을 못 하겠다.
4장 호기심에 대하여
제일 좋았던 장(1). 식물을 분류하며 시간을 보낸 훔볼트의 이야기에 강하게 끌렸다. 나도 해외 나가면 모르는 들꽃과 나무, 새 등을 하나하나 이미지 검색해서 학명 찾아 두기 때문. 외우진 않지만... "사실을 찾아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서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쓸모가 있다. (...)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생각하며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실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하다 보니 종종 여행에서도 그 습관을 적용하며 재미를 찾는다. 이를 티스토리 등의 글로 정리할 생각을 하면 여행 중 기운을 얻을 수 있다.
3장을 언급하면서도 말했지만 나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 양식에서 지리적•역사적 차이를 찾는 것을 즐기는 반면, 유명한 관광명소, 이를테면 에펠탑이나 궁전 같은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 대목이 말도 안 나오게 공감됐는데..."다음 날 아침에 잠을 깨자 강렬한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마치 핏줄 속에 고운 설탕이나 모래가 진흙처럼 쌓여 있는 것 같았다. (...) 나도 그런 유혹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또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게으름과 좀더 정상적인 관광객들이 느꼈을 진지함을 비교하며 냉담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느낌에 시달리기만 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있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독일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나라서...하... 이 여행지를 보아야 한다는 강박 및 내키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자기혐오와 냉담이란...
"나는 별 3개짜리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나는 나의 반응이 다음과 같은 공식적인 평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이런 강요가 싫어서 유명 관광지가 싫다.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이 없다면 무슨 대성당이건 궁전이건 가기도 전에 흥미를 잃는다. 실제로 나는 제프가 데려가 준 고성이-그에게는 미안하지만-정말 재미가 없어서 타성에 젖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가 천장의 장식물을 가리키며 '저건 그리스 식이다'라고 말해주자 갑자기 조금 재미있어졌다. 그의 말로 인해 이 방은 어느 나라에 영향을 받았을까, 그 시기 이 지역은 어느 나라와 교류가 많았을까, 교역으로 주고받은 장식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이렇게 느릿느릿 진화한 상태에서만 여행자는 이 교회의 거대한 신고전주의적 정면을 만든 사람이 사바티니였다는 정보를 권태와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흔히 여행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지리적으로 인접한(그러나 각기 맥락이 전혀 다른) 명소들을 한 번에 둘러보고는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호기심을 왜곡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신선했다. 과연 관광지를 맥락에 따라 배열하면 조금 더 의미를 찾기 수월할 듯하다.
5장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이 장에서는 서정시의 대가가 자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구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의 선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자연이 이기적이지 않고, 조화롭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생물학도로서 1g도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보는 사람에게 그런 심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큼은 진실이라 생각한다. 당장 이 책의 이 장도 공원에 들고 나가서 읽었다.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고 이따금씩 호수를 바라보자니 마음이 더없이 평화롭고 이 순간 바깥세상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기억의 지속성은 생각보다 강하다. 금방 싫증날 것 같다가도, 돌이켜보면 이 작은 기억이 점점이 모여 평생을 받쳐 주기도 한다. 수록된 《시간의 점》에 무척 공감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데이지에게》라는 시가 개인적인 이유로 참 좋았다. 나도 이곳 봄에 데이지가 피자 너무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에.
6장 숭고함에 대하여
이어지는 맥락으로, 저자는 자연물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만약 세상이 불공평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던 대목. 그러고보니 어머니가 이런 이유로 자연을 좋아했던 것 같다. 가끔씩 '이 거대한 풍경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우리 걱정이 얼마나 사소한 일이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약간의 불교적 통찰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인본주의자라 그리 감명받지는 못했다.
7장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제일 좋았던 장(2). 흔히 지식은 삶의 해상도를 높여 준다고들 하지 않는가? 한때 그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던 염세주의자였다가, 오히려 지식을 쌓고 공부를 많이 한 후 그 사고방식을 철회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예술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작품은 보통 대량의 정보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리는 요소들을 전경에 내세워 그것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일단 그것이 눈에 익으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에 자극을 받아 우리 주위의 세계에서도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모르고 지나칠 법한 것에 감동받는 순간은 얼마나 귀중한가.
"반 고흐에게는 관객이 세상의 어떤 측면들을 좀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화가의 증표였다." 정확한 축척과 외관의 재현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고 믿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느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흔히 사진 역시 촬영자의 사고방식과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알려준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상기한 것과 동일한 이유로 깊이 동의한다.
8장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카메라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했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카메라는 사진을 찍음으로써 우리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내가 정확히 이런 이유로 사진을 많이 찍는 것을 경계한다. 나는 항상 전자의 방식으로 카메라를 쓰려고 노력하고, 후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강박적일 만큼 '최대한 빠르게'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요소가 적절하게 담겼다고 생각하면 바로 핸드폰을 집어놓고 눈으로 감상하려 한다.
크로키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었다. 결과물이 목적이 아닌, 좀 더 '잘 보기 위한' 크로키를 해야 한다는 권유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실제로 사진을 참고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사물이 상상도 못한 색깔일 때가 많다. 스포이드 툴로 피부를 찍어 보면 웬 감색, 초록색, 오렌지색이 나온다.
9장 습관에 대하여
마지막 장, 9장에서 저자는 3장에서 언급된 이국의 사소한 것들에 감명받는 순간을 일상으로 확장한다. "우리가 (...) 그 사람들에게는 눈여겨볼 것이 없는 사소한 것들에 감탄을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식당 메뉴판의 레이아웃이 저녁 뉴스 진행자의 옷을 곰곰이 들여다본다. 우리는 현재의 밑에 겹겹이 쌓여 있는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집에 있을 때는 기대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여행의 습관을 집과 동네에도 적용해보기를 권한다.
"나는 그동안 거리를 나의 관심의 틀에 맞추어놓고 살아왔다. 이 틀에는 금발의 아이들이나 소스 광고나 보도에 깔린 돌이나 가게 진열장의 색깔이나 볼일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연금생활자들의 표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 그 대신 어떻게든 빨리 지하철 역까지 가고자 하는 집요한 요구만 남았다."
다시금 우반이 생각나서 마음에 남은 대목. 나는 다양한 나이대와 인종의 사람들이 앉아 각기 다른 일을 하는 걸 지켜보는 게 재미있다. 누구는 뜨개질을 하고 누구는 음악을 듣고 누구는 감자튀김을 먹는 전철 내부 풍경이 매일매일 새롭다. 그러니 나는 독일에 거주한지 4개월째, 아직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고국을 떠나 나밖에 없는 이곳에서, 오롯이 혼자서,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나만의 생각을 하며. "동행자에게 면밀하게 관찰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억제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너무 정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3월의 어느 오후에 해머스미스에 홀로 있으니 그런 근심이 없었다. 나에게는 약간 괴상하게 행동할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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