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활동을 좀 해야겠다는 초등학교 동창 다람이와 독서모임을 꿈꿔 온지 n주째. 우리는 우리 둘 이외의 멤버는 모집하지 못한 채 첫 번째 독서모임 활동을 시작했다. 첫 활동은 대구에 위치한 책방 <이층>의 북토크에 참여하는 것. 스케줄에 맞는 날을 고르다 보니, 안희제 작가님의 <망설이는 사랑: 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북토크는 책을 읽어 가기도 하고 읽지 않고 가기도 한다고 한다. 나와 다람이는 모두 북토크 첫 참여에 의의를 두었기에 블라인드 상태로 참여하기로 했다. 나는 대개 앞자리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 날은 책을 안 읽어 왔기에 중간 즈음에 앉았다. 그러나 읽어 오신 분들조차 묘하게 뒷자리부터 채워 앉는 경향이 보였는데...
북토크를 온다 ⊂ 책을 좋아한다 ⊂ 내향인이다 → 뒷자리를 선호한다...? 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가설을 하나 세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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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댓 명 정도 되는 자리가 하나둘씩 차고, 지각하는 참여자들을 배려한 3분 정도의 시간도 지나자, 책방 사장님의 소개와 함께 북토크가 시작되었다. 작가님은 본인이 어느날 뮤직비디오를 본 이후로 자신도 모르게 '입덕' 하셨다는 가벼운 에피소드로 말문을 트셨다. 책방 사장님의 소개에 의하면 작가님은 크롬병 당사자로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 오시던 분인데, 신작이 나와서 봤더니 뜬금없이 케이팝 관련이라 놀라셨다고.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케이팝 덕질을 하다 보면 누구나 부딪히게 되는 문제, '논란'이었다. 케이팝 산업에서 유독 민감한 이 '논란'이 형성되는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문외한인 나는 이런 게 '사회학적' 분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사회학 아니고 인류학이라고 하셨다...) 1부는 케이팝 산업의 공론장을 하나의 마을로 놓고 분석한 내용. 케이팝의 논란은 그 자체로 attention economy의 일종으로, 판매자 측에서 관심을 받아 이득을 취하던 기존의 관심경제 구조와 달리, 부정적인 관심을 아이돌에게 집중되게 하고 그 이득은 일명 '사이버 렉카'들이 챙겨 가는 구조라고 한다. 토크는 책방 사장님이 중간중간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주로 작가님이, 일부는 참여자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때 사장님은 연예인이 공인이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전반적으로 '예', 나를 포함한 두 명은 '아니오'에 손을 들었다. 작가님은 공인의 기준을 인용한 논문으로부터 크게 세 가지, '국민들이 선출한 사람인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가?', '사회적 영향이 큰가?'로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공인의 정의나 범위보다는 그 단어를 사용할 때의 일반적인 맥락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싶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공인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요구하고 비난할 때 그 정당성을 보충해주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Q. 케이팝 가수에게는 엄격한 윤리적 잣대와 사생활의 검열이 요구된다. 반면 외국인 아티스트에게는 별로 그런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그래야 할 대상인 정치인에게조차 그 정도의 윤리적 잣대를 요구하지 않는데, 왜 케이팝 아이돌, 나아가서는 한국 연예인 전반에게 유독 심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나.
A. 요즘은 덜해졌지만 한국에서 연예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본인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비교적 덜 고생하며, 돈은 훨씬 많이 버는 사람'이었다. 최근에는 인플루언서 등이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이 연예인에게서 흠을 발견하는 순간, '나와 같은 사람인데 왜 너는 그렇게 돈을 쉽게 많이 버느냐', '너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현상이 있는 것 같다.
1부가 마을에 대한 전반적인 조경이라면, 2부는 마을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인터뷰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법적인 영역에서 잘잘못이 모호한) 논란에 휩싸인 아이돌을 덕질하던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고 한다. 아이돌이 논란을 일으키면, 그리고 그럼에도 덕질을 계속하면 팬이 겪게 되는 일련의 일들과 윤리적 고뇌 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까지 사장님과 작가님이 토크를 주고받았고, 이쯤에서 사장님께서 참여자와의 소통을 유도하셨다. 먼저 각자의 '최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으로 물꼬를 틀었다.
내게도 순서가 돌아오기에 나는 케이팝 쪽의 팬은 아니며 대신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드린다고 했다.
Q. 아이돌 산업이 '관심산업'이라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최근 많이 거론되고 있는 <도둑맞은 집중력>의 주요 요지는 'SNS는 사람들이 오래 머물수록 광고를 많이 보고 수익을 많이 얻는 구조이기 때문에, 최대한 사용자들의 집중력을 흩트러뜨리고 의존성을 높이려는 방향으로 설정되며, 사용자의 실제 만족보다는 관심을 오래 끄는 것을 목표로 한다'라고 생각된다. 아이돌 산업도 하나의 관심산업으로서 비슷한 구조로 기능한다고 생각하는가.
A. 아이돌 산업은 SNS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비슷한 부분도 있다. SNS는 인터페이스부터 '무한 스크롤'을 차용하는 등 집중력을 교란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시스템이 자리잡혀 있다. 아이돌 문화 역시 티저, 퇴근길, 라이브 등 정신없이 많은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으며, 역설적으로 더 많은 컨텐츠를 갈망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둘 모두 중독산업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차이점이라면, SNS는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는 구조로 설계된 반면 아이돌 팬덤은 기본적으로 한 컨텐츠를 여러 번 돌려보고 오래 집중한다. 실제로 아이돌 팬덤들은 덕질 대상에 한해 가공할 기억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저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혹은 중독산업이라는 개념의 기저에 깔린 주장과 같이) 집중력을 하나의 소모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아이돌 산업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집중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넓고 새롭게 재설정함으로서 더 심도 있는 고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Q. 저는 아이돌은 잘 모르지만 인디밴드를 오래 좋아했다. 최근 느끼는 바로는 밴드 역시 일부는 아이돌 팬덤 문화처럼 변모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돌 밴드를 컨셉으로 데뷔한 밴드 외에도, 팬들끼리 팬덤 문화를 자체적으로 아이돌 팬덤처럼 조성한 밴드도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팬덤들이 튼튼하고 결속력이 좋으며 돈도 많이 쓴다. 아이돌, 아이돌과 유사한 존재 혹은 아이돌 덕질과 유사한 덕질 방식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공통분모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저 역시 고화질의 보정사진이 올라오는 스포츠 선수, 버블을 하는 배우 등 아이돌처럼 덕질되는 아이돌이 아닌 사람들을 보았다. 이는 그들 자체에 어떠한 특성이 있다기보다 소비자인 팬덤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아이돌 덕질의 문화가 다른 영역까지 확장되어 나가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질문을 할 때 있었던 재미있는 일.
작가님: 저도 인디밴드를 오래 좋아했고, 저는 부산의 해서웨이와 보수동쿨러를 좋아하는데...
나: 흐억 어머
작가님: 어, 혹시...
나: 아이고, 안녕하세요 (모두가 와하하 웃음)
작가님: 아... 좋아하시는구나, 어우... 되게 반갑네요...
사인 받을 때 들은 말에 의하면 보수동쿨러의 <베티>와 <목화>를 특히 좋아하셨다고.
다른 질문들은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본다.
Q. 외국인 멤버가 케이팝 문화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A.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케이팝 문화를 공고히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나도 첨언: 특히 외국인 멤버의 경우 언어뿐만 아니라 취향 등에 있어서도 '한국인 같을수록' 더욱 칭찬을 받는 풍조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외국인 멤버는 오히려 한국인보다도 기존의 케이팝 문화에 순응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Q. 아이돌 팬덤 문화가 경시되는 풍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멋지게 논의해 주셨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Q. '팬덤 정치'라는 단어도 저는 우스웠다. 역대 대한민국은 팬덤 정치가 아닌 적이 없었는데.
A. '팬덤 정치'라는 단어 역시 사실상 젊은 여성들이 이재명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두고 멸시의 의미로 사용되던 말이다. '아이돌 팬덤은 어린 여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편견과, '어린 여자는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며 불합리할 것'이라는 편견이 결합한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
Q. 케이팝 행사에서 행해지는 과한 통제 문화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A. 저도 팬사인회에 가 봤는데, 온종일 느끼고 온 것은 '식별과 통제'였다. 수 차례 본인임을 식별하고 사진을 찍지 않나 내내 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최근에는 SNS로 과한 몸수색 사례, 예매 본인이 아니면 절대 출입할 수 없었다는 사례 등이 보였다. 다른 문화 공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기이한 경험인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분들이 그렇게까지 생각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어린 여자애들이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앞서 말한 '팬덤은 주로 어린 여자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편견에 대한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Q. 일부 팬덤에서는 팬들이 자원해서 하는 선의의 행동들에 대한 미담이 들려 온다. 좋은 팬덤 문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아미의 미담을 예시로 들며) 물론 순수하게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일부는 아이돌 팬덤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달라요'하고 외부에 인정받으려는 퍼포먼스로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좋은 팬덤 문화가 무엇이냐를 따지기보다는, 외부가 어떻게 '좋은 팬덤'을 규정짓는지, 기본 인식이 왜 나쁜지, 무엇이 그들을 증명해야 하게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Q. 망설임이라는 감정을 긍정적으로 조명하신 점이 많이 위로가 되었다. 제목을 먼저 정하셨나, 나중에 쓰셨나?
A. 처음에는 다른 제목이었는데, ~ (말씀해 주셨는데 까먹었다. 불균등한 공론장? 비슷한 어감이었음)였다. 이런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은 제목을(웃음)…. 원래는 초점을 1부에 두었고, 2부의 내용도 포함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정해두고 있었는데, 편집자님이 아무래도 <망설이는 사랑>이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 바꾸게 됐다.
마지막에는 각자 자신의 '덕질 대상'을 말하며 끝내기로 했다. 아이돌을 말씀하신 분도 많았고, 가야금을 비롯한 국악을 말씀하신 분도, 유튜버를 말씀하신 분도 계셨다. 이세계 아이돌을 꼽으신 분도 있길래 끝나고 '저도 징버거 좋아해요(지인에게 주입됨)'라고 말씀드려 보았다. ㅋㅋㅋ 나는 '말씀드렸듯 인디밴드를 좋아하고,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넬과 크라잉넛입니다, 락윌네버다이!'라고 우렁차게 외치고 마무리했다.
작가님께 사인을 받고, 몇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왔다. 말을 별로 하지 않았던 다람이도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며 꽤 신나 있었다. 그리고 내게 우리의 독서 모임을 주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나도 모집이 잘... 안 됐어...^^ 나는 오랜만에 머리를 2시간 반 내내 풀로 돌렸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고양되었다.


책방에서 발견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책들... 읽고 있는 책을 처리하고 나면 둘 모두 읽어보기로 한다.
이하로는 북토크 이후에 있었던 소소한 일상 이야기.

다람이가 기차를 예매해 두었다기에 동대구역 근처로 이동 후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본래 목표로 한 것은 지하의 1인 샤브샤브였으나... 에스컬레이터 코앞에 자리한 겐츠베이커리가 우리를 유혹했다. 우리는 들소처럼 흥분했다가 가격표를 보고 조금 진정했는데, 트레이를 들고선 한참을 고심하다가 인당 두 개를 골랐다. 나는 트러플소금빵과 치킨시저치아바타. 사실은 바게트와 크로와상이 조금 탐났지만 플레인은 없고 전부 과한 토핑이 되어 있어 최종 탈락했다.
가게 공간은 협소한데 사람은 많아서 꽤나 혼잡했다. 그 덕에 직원 분들은 새 빵이 나올 때마다 인파 사이를 뚫고 '뜨겁습니다, 비켜주세요'를 외쳐야 했는데, 새로 나온 트러플소금빵이 우리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 뭐에 홀린 듯... 졸졸 따라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마냥... 김이 폴폴 나는 뜨끈뜨끈한 소금빵 위에 풍부하게 발린 트러플오일은 냄새만으로 굶주린 우리를 혼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계산을 마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울 때 한 개만 먹고 가자고 합의를 보았다.
갓 나온 뜨끈뜨끈한 트러플소금빵은 그냥... "끝내줬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사진도 없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봉지에 2개입이라 하나는 서서 뜨거운 걸 먹고 하나는 귀가 후 먹었는데, 후자도 맛있었지만 역시 전자의 압도적인 향, 식감, 결, 숙성도, 빵 고유의 맛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밥 먹는 내내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카페로 이동해서도 계속 소금빵 얘기를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줄곧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강렬했던 트러플소금빵의 기억...
밥은 그냥 푸드코트에서 먹었고 그냥... 푸드코트 밥이었다.

다람이의 버스 시간이 한 시간 조금 덜 남아서 복합환승센터로 이동 후 건물 내의 할리스커피에 갔다. 나는 밤이니 초코라떼, 다람이는 아메리카노. 너 저녁에 커피 마셔도 괜찮겠니? 물어보자, '난 잘 자'라는 태평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변함없이 모든 일에 있어 무던한 스탠스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체질조차. 그녀가 20년 전에 결혼적령기를 맞은 남자였다면 1등 신랑감으로 꼽혔을 것이다.
유행에 탑승해 수박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다람이의 핸드폰을 빌려 나도 한 판 해 보았다. 북토크 이야기와 소금빵(...)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나서 그는 떠나갔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서.
나는 <망설이는 사랑>을 한 부 사 왔다. 차근차근 읽으며 오늘의 기억을 다시 되짚어보려 한다. 첫 북토크 경험, 기록 끝.
+)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족: 결국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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