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ere I Stay/개똥철학

국가와 사람과 안전감

by 연일생 2025. 4. 6.

 



최근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읽고 있다. 서론만 요약하자면: 사람됨은 태어나서부터 부여되는 속성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개인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속성 혹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낙인은 장소에 강하게 의존한다. 우리는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으로 지구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환경은 한정되어 있으며, 이를 환대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환대받을 자격이 있다는 논조로 전개된다네요. 흥미롭다...

 

=========================================================================

 

독일은 누구 소개로 간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곳에 지원서 넣어 간 거라 지지 기반 하나도 없는 채로 맨땅 헤딩했고,

반면 내 고국은 어찌됐든 이십 년 이상 발 붙이고 살아온 곳이고, 가족도, 친구도, 스승도, 직장 동료도, 추억도, 유년기도, 공유하는 문화도, 그 모든 것이 거기에 있는데도

나는 어째서 독일에서 더 안전함을 느끼는가...

보통은 타국을 도전, 고국을 안정으로 간주하지 않나.

하지만 뭐가 잘못되면 큰일날 거라는 감각은 한국에서 더 강했고, 주변이 뭐라도 해결해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는 오히려 독일에서 강했다. 한국에서는 가정도(사이 좋고 친하고 정말 사랑하지만 의지가 되지는 않음) 직장도 공권력도 사회보장제도도 내게 어떤 안전감도 주지 못했는데 독일은...국가와 제도 단위에서 일단 사람 대접을 해준다는 느낌이다.

 

얼마 안 지낸 독일에 너무 자아의탁하는 것 같아서 독일 어떠냐는 한국 지인들의 질문에 매번 '몰라요, 지금은 초반이라 좋은데, 3년쯤 지내다 보면 독일의 단점도 구질구질하게 싫어지지 않을까요?'라고 일관되게 답해왔으나, 지금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국보다 더 싫어질 것 같지는 않다(ㅋㅋㅋ)

그렇지만 역시 3년쯤 지내봐야 확신이 서겠죠...

Meanwhile,

제프: 졸업 후 독일에 남을 거냐

일생: 글쎄, 지금은 얼마 안 있어봐서 모르겠다. 왜, 초반엔 뭐든 긍정적인 면만 보이지 않느냐

루키: 응??? 아니, 난 아녔다

일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박사 첫학기에 졸업 후 일정까지 생각을 하는 거야? 동일한 질문에 대한 "나는 최대 한 달 뒤까지의 계획만 세우고 살아"라는 샘의 대답이 무척 인상 깊어서 나도 종종 그렇게 대답하고는 하는데...

 

그리고 민이와 지지 기반 얘기하다 새로이 깨달은 건데, 나는 친척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 입장에서 '외국에 정착했을 때 잃을 수도 있는 끈끈한 관계'에 친척이 들어가는 민이가 이해되면서도 좀 신기했다 ㅋㅋㅋ 우리 쪽은 뭐...연 끊고 살 만큼 사이가 나쁘지도 않고 부러 어울릴 만큼 좋지도 않아서 명절 등 어쩔 수 없는 일에 만나면 억텐으로 화기애애한 사이 정도이다. 뭐 흔하지 않나? 물론 친척끼리 친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흔하다고 생각한다.

 

=========================================================================

 

우리 연구실에 신입이 들어오면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포닥 박사님(가명은 아대로 하겠음)이 자신을 소개하며

서버 관리, 공유 데이터 관리, 분석 도움과...emotional support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모두가 와하하 웃었더랬다.

아무래도 분석 기술에 대해 연구실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보니, 모두가 문제가 생기면 아대 박사님에게 들고 와서 하소연하기 때문에 ㅋㅋㅋㅋㅋㅋㅋ 해결되면 좋은 거고 안 되어도 emotional support가 된다고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생각하면 내 좌충우돌 크레이지 중국 생활의 CS 및 emotional support는 제프가 죄다 해줬다네요...

사실 없어도 어떻게든 해냈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중국어 네이티브에게 의지하지 않기란 너무 큰 의지력을 요구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조건 없는 베풂을 거의 처음 받아봐서 감동을 적잖이 받은 탓에

일찌감치 잃을 걸 걱정하는 성향과 합쳐져 한때 좀 심하게 집착했는데(미안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그때 느낀 감동과 안정감은 사람 자체가 좋은 사람이어서도 있지만 내 상황이 특수했던 탓도 있기 때문에

사람 자체보다는 기억을 소중히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상황의 특수성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그가 그런 긍정적 충격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무의식이 그를 안정감을 주는 상대로 지정해놓다 보니 단점을 안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친구를 이렇게 우상화하는 것도 관계에 영 건강하지 못한 행동이고...

 

그리고 받기만 하는 관계가 처음이라 좋은 쪽으로 충격이었던 건데

역설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는 나한테 너무 불안하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됐네요(ㅋㅋ)

아니...!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관계라니 심지어 걔처럼 정신 건강하고 결핍이 없는 사람을 처음 봐서 내가 이모셔널 서포트를 해줄 필요도 없다니...!

민이와 차차는 날 감쓰로 쓸 수 있었고(ㅋㅋㅋ) 하나는 필요할 때 내가 같이 있어줄 수 있었고 유니와 양양과 베이스군은 내가 일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는 이중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아서 걔가 어느날 갑자기 연일생항상이상한소리만하고재미없어차단할게 해도 나는 무력하게 떠나보내는 수밖에 없다고...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정병망상에까지 이르고 마는데...

 

이런 개헛소리하면서 민이한테 하소연하다가(이제 누가 감쓰지??) 갑자기 탄핵 인용되고 정신 차림

아 역시 내란성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뿐이었나? ㅋㅋㅋㅋ

I am

no longer

mentally

ill

 

=========================================================================

 

역시 나를 일하게 하는 원동력은 불안감이었고

극단적인 환경을 견디게 하는 근원은 정상적인 환경을 모르는 무지였다는 걸 깨달은 요즘

한국사회 대체로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24년 상반기까지의 연일생은 정말 한국에 적합한 인재였는데 말이죠

이젠 풀어져서 실수로 미팅도 빼먹고 게을러져서 곤란해...

 

언어장벽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는 전보다 조금 소극적이게 됐지만

모르는 사람들 100명 앞에서 노래(진심못함)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꼭 그렇지도 않나?

 

여러가지로 안정감과 안전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