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 밖의 세계

✨230822-29 싱가포르 여행(1): 타국과 환대와 이방인

by 연일생 2023. 9. 6.

 
 해외라고는 학교 전공기관 탐방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돈 받아 간 일본, 역시 학교 프로그램으로 교수님 따라간 미국밖에 안 나가본 연일생은 민이에게서 싱가포르 여행을 제안받는다. 연유인즉슨 싱가포르 거주 중인 친척분의 초대를 받아 집에 머무르도록 권유받았다는 것. 동반 1인까지 허락받은 점과 아주 조금 넉넉해진 지갑까지 합해진 좋은 상황에, 연일생은 최초로 사비 해외여행을 가기로 결심한다.
 
연구실 선배에게 그 소식을 알리자 그는 '아 싱가포르 씹추'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던 단어로 강력한 권유 의사를 내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런데 그냥 내 추억보정일 수도 있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다소 적극적이었던 의사표현을 과학자답게 디펜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추후,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 잘 기억하지 않는 그가 연일생의 출국이 다가오자 동일한 배치의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완벽한 수미상관이 완성되었다.
 
시기가 조금 애매했기에 둘 다 출국 전까지 굉장히 바빴다. 나는 졸업 직전이라 연구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해야 했고, 민이는 반대로 귀국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복학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 '오늘은 정말 비행기 예약을 하자', '오늘은 기필코 첫 날 숙소를 예약하자' 등의 말을 주고받던 둘은 결국 큰 틀만 짜놓고 얼레벌레 출발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여행계획은

  • 민이의 픽
  • 씹추 발언 선배의 추천
  • 트리플 어플 추천

을 종합한 후, 일생이 시간과 동선을 조합해서 완성했다. 추후 고모*의 검수 및 즉석 수정을 거쳐 실제로는 저 일정표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민이네 오촌 고모. 여행 내내 나도 고모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지냈기 때문에 이하 그냥 고모라고 작성한다.)
우리가 여행 전에 한 일은 다음과 같다.
 

  • 대강의 날짜 및 체류 기간을 정한 후, 직항으로 가는 최저가 항공 예약
  • (밤에 도착하는 비행기였으므로) 첫날 숙소 예약
  • 환전 10만 원, 마스터카드 확인
  • 로밍 혹은 USIM 구매
  • 고모 드릴 선물 구매
  • SG 입국카드 작성(하단 사진 참고)

 

 
제주항공에서 보내준 안내문(좌)와 트리플 어플에서 본 싱가포르 기념품 추천 게시글(우). 트리플은 여행 스케줄을 만들고 공유할 수 있는 어플인데, 장소별 이동거리도 자동 계산해주기 때문에 나름 유용하게 사용했다.
 

 
*
*
*

 
 
1일차: 밤 도착, 숙소 이동
 


우리 비행기는 저녁 6시에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편(便)이었기 때문에, 1시 40분에 동대구역에서 출발해 3시 경 공항에 도착하는 시외버스를 타기로 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수속하겠다는 일정이었다.

당일, 모든 일을 미루고 미뤘던 우리는 둘 모두 짐싸기를 당일 새벽에 마쳤다는 사실을 공유하며 친근감을 다졌다…. 그리고 시외버스에 탑승할 즈음 민이가 으레 그러하듯 조금쯤 늦는다는 카톡을 날렸지만 그녀는 포항여행 때도 기차와 함께 도착했기 때문에 나는 믿고 있었다. (???: 봐 민이는 시간에 맞춰 온다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너무 딱 맞춰 오는 바람에 40분 출발인 버스를 위해 40분 40초쯤에 도착했고…안타깝게도 버스는 40분 00초에 출발해 버렸다. 애석한 일이다. 시간을 좀 끌어 주려고 버스기사님께 찔러 봤지만 쿨한 기사님은 '시간 맞춰 오면 타는 거고요'하는 단호한 말로 생략된 뒷말을 명확히 하셨다.
나는 깔깔 웃으면서 인스타 스토리에 돌발상황의 기쁨(?)을 나누었고(민이: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민이는 요행히 1시간 뒤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어 새 티켓을 끊었다. 민이는 점심을 이미 먹었다기에, 그녀를 기다리는 사이 공항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왠지 비행기 탈 때의 관습이 되어버린 롯데리아를 먹고 싶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김해공항 롯데리아는 시공 중이라 영업중단 상태였다. 그리고 김해공항... 놀라울 만큼 뭔가 없다... (...) 하는 수 없이 푸드코트에서 개비싼 낙지볶음 정식을 시켜 먹었다. 낙지볶음은 입에 맞는 양념과 그러나 전반적으로 모든 곳에 포함되어 있어 은은하게 거슬리게 하는 텁텁한 입자가 어우러져 돈 값을 한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고급화를 노린 것인지 물병을 따로 주지 않고 종업원을 불러 내 컵에 따르게 해야 하는데, 그냥...물병 줬으면...했다. 그런 건 고개만 들어도 어딘가에서 나타난 웨이터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컵을 채워주던 서울의 모 파스타 집 같은 곳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된장찌개가 맛있었으니 용서해 주겠어

 
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220V 어댑터를 사려고 했는데, 한국-미국 어댑터밖에 팔고 있지 않았다. 민이의 멀티 컨버터에 포트가 많다기에 빌리기로 하고 빈손으로 나왔다.
 

김지윤. (2019, 02.19). [생활TECH] 220V 콘센트를 사용하는 한국과 중국, 왜 모양이 다를까?. TECHWORLD ONLINE NEWS. https://www.epnc.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492

 
붙임 사진 참고. 우리가 필요했던 건 M to C, F 어댑터. 판매하고 있던 건 B to C, F 어댑터.
 

 
민이와 기적적으로 상봉하자 왠지 굉장히 말쑥한 안색의 그녀가 나를 맞아 주었다. 수영 다녀온 직후에 머리도 안 말리고 왔다고... 출국 날 오전에 수영하고 점심 먹고 셔틀에 늦을 여유가 있었단 말이야? 나는 그녀의 해외에 대한 낮은 긴장감에 조금 놀랐다. (ㅋㅋㅋㅋㅋ) 유럽에서 비행기 10번 타다 보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면세점의 위치를 몰라 직원분께 물어 보자, 장년의 남성분에게서 '여 안에 들어가면 있심다' 하는 구수한 대답이 돌아왔다. 민이가 들어가던 도중 종이 항공권을 가지고 싶다며 되돌아 나오자, '와 도로 나오노'하고 말씀하셔서 빵 터졌다. 보통의 공항은 뭔가 경직되고 딱딱한 이미지였는데 친근한 직원분을 만난 의외성에 웃겼던 것... 그리고 그 생각은 10분 만에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점에 들어오자 더욱 강해졌다. 무언가 윤선생 키즈 퀘스트에서 들었던 것 같은 둥 두두둥 봉고 BGM과 함께 미지근한 기온과 습도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면세점도 공항 관계자 분들도 전혀 날이 안 서있고 편안하다...? 우리는 편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떨떠름함을 느끼며 국내여행하러 동대구역에 온 기분을 곱씹었다. 사람도 없고 그에 따라 시간도 떠서 더 했다. 체크인은 진작에 셀프로 했고, 수속은 말했듯 10여 분만에 끝났고, 위탁수하물 미포함 항공권이라 수하물도 맡기지 않았으며, 고모 선물은 면세점에서 2분 만에 수령했다. -끝- 우리는 공항 특유의 tension이 꽤나 스트레스 받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행의 설렘도 한층 강화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우리였다.
 

시간이 떠버린 우리는 서로의 캐리어를 돌발 오픈해 구경하며 일정에 맞는 룩을 고민했다. 컨셉을 맞춰 입으면 사진에 잘 담길 것 같았기 때문. 여름옷이라 부피가 크지 않은 덕에 5박 6일간 입을 옷을 전부 담기에 충분했다. 연일생은 3박이 넘어가면 옷 하나당 두 번은 입는 편인데, 연일생 역시도 무식한 수트케이스 사이즈에 양껏 옷을 담아 왔다. 물론 그러고도 널찍했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기내 수하물 사이즈를 잘못 안 연일생은... 비행기 타기 직전에 위탁수하물로 맡겼기 때문에 10만 원에 달하는 엄청난 추가금을 내버리는 비극을 맞았다. 이게 무슨 전래동화 같은 교훈이람. 잠깐 정도 이 트렁크를 가져온 것을 후회했으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귀국할 때 무척 큰 도움이 되었기에, 트렁크는 거거익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빵떡이가 선물해 준 나의 귀여운 캐리어...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든다. 여태 캐리어 없이 살아왔던 연일생은 첫 캐리어에 애착이 컸다. 겨울에 강원도를 5박6일 다녀올 때에도 백팩과 보조가방 하나로 버티던 삶이여, 아디오스! 사실 사려면 굳이 못 살 것도 없었지만 단체생활할 때에는 번거로울 것 같아서 안 사고 버틴 것도 있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바른생활에 길들여진 연일생은 무척 잘 자버렸다. 6시간의 짧지 않은 비행 시간, 나는 민이에게 작성 중인 논문을 읽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을 말해달라고 했다. 어느 정도 비슷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세부분야에는 전혀 문외한인 사람의 감상이 절실했기 때문. Introduction과 Results까지만 읽고 이런저런 피드백을 남겨준 민이는 뛸 듯이 기뻐하는 연일생을 뒤로하고 다이어리를 조금 적다 잠에 들었다. 연일생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신라면 컵을 주문해 먹었다. 저번 미국여행 때 분명 빵떡이가 '비행기에서 음식과 술을 돈 주고 먹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분개했는데 이번에도 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유료였다. 저가항공이니 이해해야겠지~ 하고 5천원짜리 컵라면을 후루룩 먹고 있자니 냄새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앞 옆 뒤에서 컵라면의 요청이 쇄도했다. 나를 시작으로 일어나는 연쇄작용을 보며 머쓱해하고 있으니 민이가 소감을 물었다. 연일생의 대답은 "한 놈 시키면 승무원이 '아, 시작됐다'라고 생각할 것 같다".
 

 

창이공항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이렇게 넓게 깔린 카펫이라니. 저렇게 훌륭한 조명과 금빛의 빛나는 구조물이라니! 우리는 편의점에서 각자의 간식거리를 샀다.

종류별로 있는 불닭볶음면에 조금 경악했다.

싱가포르는 도착 당시 밤 11시와 12시 사이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택시를... ... 존나잘못걸려서... 민이한테 카톡으로 '좃됐다'라고 보냈다... 그 세 글자만으로 충분히 의사전달이 되었을 정도로 공격적인 운전을 선보였다. 신호 때문에 정차했을 때 민이와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는데 차가 출발하자 무슨 만화 연출마냥 뛟 하고 날아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거 되게 현실적인 연출이었구나... 현실에서 가능한 거였구나??? 네비소녀가 무슨 구간이라고 Drive carefully 하랬는데 전혀 carefully하지 않았다. 하차 후 짐을 내리자마자 다시금 총알처럼 날아가는 택시의 뒷모습을 텅 빈 눈으로 응시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한참을 헤매다 물어물어 로비를 찾고... 텅 빈 로비에서 야근의 피로에 찌든 듯한 안내원을 통해 체크인을 마쳤다. 하루 18만원 주고 예약한 호텔은 돈 값을 하는지 꽤나 시설이 좋았다! 어쩐지 4성이더라(아고다 기준). 싱가포르의 미친 물가와 숙박비를 생각하면 4성급에 18만원이면 그럭저럭인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워터파크가 딸려 있어서 뽕을 뽑지 못하는 우리를 통탄하게 하였다...
사실 취소하지 못해서 온 숙소이긴 하지만 꽤 좋은 선택이었다며 만족했다. 일단 여행 느낌이 나고, 호텔에서 쉬는 건 그것만의 자유와 행복이 있었기 때문. 또 고모가 괜찮으니 밤이라도 오라고 하셨지만 그렇게까지 격의 없게 신세지기에는 너무 죄송했다.
 

 
야식을 조금 바삭거렸다. 감자칩은 꽤 훌륭한 선택이었고 젤리는... 아팠다. 민이가 '이거 좀 아프지 않아? 특히 오렌지맛은'이라고 말했을 때에는 신맛을 과장한 것이겠거니 해서 나는 레몬맛이 더 시니 어쩌니 딴소리를 했는데, 바닥에 깔린 사워파우더가 묻어 나오자 혀가 물리적으로 아픈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아프네... 아 오렌지맛이 심하네...' 하고 민이가 표현하려 한 것을 차례차례 깨달으며 그녀의 말을 반복하자 민이는 공감할 사람이 생긴 기쁨에 낄낄 웃었다. 나는 트리플 게시물에서 추천 선물로 나왔던 킨더 해피 히포를 사 먹었는데(근데 이제 한국에도 판댄다) 아는 맛이자 훌륭한 맛이었다. 유사한 맛을 떠올려 보자면 Bon o Bon과 초코하임의 중간 정도 맛?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취향에 따라 냉장해 두면 조금 더 맛있을 수도 있다. 초코하임 실온보관파인가 냉동파인가에 따라 결정하시면 되겠다.
장기 비행에 샤워에 대한 갈망이 평소의 3배쯤으로 증가하였지만 자고자 하는 욕망은 평소의 5배쯤 되었으므로 꼬질꼬질하게 잠든 후 아침 샤워를 하기로 했다. 뒤척이며 핸드폰을 보는 민이를 뒤로하고 기절잠을 잤다.

 
*
*
*
 

2일차: 고모네로 이동, 동물원

 

 
민이의 알람을 두 번쯤 끄고 기상한 연일생은 민이를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 알람을 너무 여유 있게 맞춰 둔 탓에 시간이 차고 넘치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두기로 했다. 시간 절약을 위해 먼저 샤워하고 나오니 민이도 반쯤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적도의 강한 햇살이 내려앉은 상쾌한 풍경을 만끽하며 민이가 씻는 동안 꽤나 사치스러운 아침을 먹었다. 모닝커피와 초콜릿! 아마도 초코송이의 원본인 듯한 초코룸스는 어제 한 입 맛보고 놀란 그대로, 무척 고급 초콜릿이었다. 이 정도면 훌륭한 티푸드. 내가 조금 더 여유가 있던 탓에 머리를 말리며 짐을 정리하는 민이에게 홍차를 타 주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짐을 정리하는 민이와 쉬고 있는 연일생 구도는 계속되었다... 나는 내 캐리어가 넓은 탓이라고 해석했지만 민이는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듯 몹시 의문스러워했다. 맥시멀리스트의 삶이란...
 

 
호텔 정원의 플랜테리어는 막 찍어도 장관이었다. 싱가포르에 머무는 내내 조경의 아름다움에 몹시 감탄했는데, 적도라 식물이 잘 자라는 덕에 그런 문화가 발달한 건가 하고 추측했다. 하긴 우리나라의 변덕스러운 기후 하에는 조금만 신경 안 써주면 마르거나 웃자라거나 병 걸리거나 뒤틀리거나 아주 난리가 나지... 우리는 자판기에서 무언가 뽑으려 시도하다, 정원의 사진을 마음껏 찍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구도가 잡힌 연일생은 빨리 저쪽에 가서 서보라며 강제로 피사체를 섭외하길 반복했다. ㅋㅋㅋㅋㅋ 위를 봐, 이제 저쯤을 봐, 머리에 손을 대 봐 등등의 세세한 요구를 하자 민이는 조금 귀찮아했지만 결과물을 보고 나의 디렉팅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귀엽게 생긴 새. 까치처럼 뛴다.

황송하게도 고모가 택시까지 불러다 주셨기 때문에 그대로 탑승하여 고모네로 이동했다.
우리가 여행 내내 사용하던 택시 어플은 Grab. 그냥 카카오택시처럼 이용하면 된다.
 

 
고모네 댁에 도착하자 주차장부터 나와 계셨던 고모가 우리를 무척 환대해 주셨다. 고모는 극 E 성향이신 동시에 조곤조곤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가진 분이셨다. 그리고 민이가 고모를 무척 닮았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면세점에서 수령한 선물을 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고른 선물은 오설록의 화려한 티세트와 오쏘몰 30일분, 그리고 자녀분들께 환심을 사기 위한 크레용초콜릿. 탁상 위에 이미 오쏘몰 두 박스가 개봉된 채 놓여있는 걸 보고 민이와 나는 조금 안심했다. 선물을 고르던 도중, 내가 오쏘몰을 제안하자 민이는 '영양제 안 좋아하면 불호하거나 모를 수도 있지 않겠냐' 하고 망설였기 때문. 꽤나 갈등하다 선택했는데 평소에도 드시는 것 같아 안도했다. 고모가 왜 그러냐고 물으셔서 해당 사실을 말씀드리자, '비싼 것도 사왔네 너희~'하고 웃어 주셨다. 그러므로 아주 친밀하지 않은 사이 선물의 조건: (1) 작은 것 여러 개가 아닌 큰 것 한 개, (2) 적당히 높은 가격대의 고급 브랜드, (3)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함, 세 가지를 모두 갖추는 데 성공한 셈이다. 꽤 뿌듯했다.
우리가 도착할 당시는 평일 오전이라 집에 계시는 건 고모와 헬퍼분 뿐이었다. 듣기로는 우리 또래이시라고. 싱가포르의 헬퍼 문화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친구분에 의해 들은 바가 있었다. 싱가포르 달러는 비싼 편이다 보니, 싼 값으로 인접한 나라의 가사도우미를 고용할 수 있다고. 한 명이 헬퍼로 일하면 일가족이 먹고 살 수도 있다는데 이것까진 카더라라 확실치 않다. 환율의 마법에 대해서는 조금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여하간 입주형 가사도우미가 있다니 멋진 삶이다... 그리고 고모가 직접 설거지나 청소, 빨래를 맡지 않으셔서 마음의 부채가 조금 덜했다 (ㅋㅋㅋㅠㅠㅠ)
 
원래는 교통카드를 사려고 했는데 고모께서 자녀분들 것을 빌려 주셨다. 워낙 작고 밀집된 도시국가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대중교통이 무척 잘 되어 있었고, 값도 리즈너블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체감상 한 번에 2000~2500원 정도? 하차 시에도 카드를 꼭 찍고 내리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하긴 서울도 거리별로 차등 부과하니 하차 찍는 것 같더라... 교통카드를 받고 식사와 과일을 대접받았다. 참깨 드레싱 제일 맛있는 거다~ 오이무침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에요~ 하고 호들갑을 떨자 고모가 '너희 진짜ㅋㅋㅋ'하고 멋쩍게 웃으셨다.
망고스틴은 말도 안 되게 달았고 용안(龍眼)...을 닮은 저 알 수 없는 과일에서는 독특한 맛이 났다. 젤리 같은 식감, 심심한 맛, 그리고 실수로 씨를 씹었을 때 급습하는 강렬한 쓴맛. 저걸 먹으려면 느슨한 맛에 긴장감을 주는 씨앗과의 밀당을 감수해야 했다.

고모네 아파트에는 무지 큰 수영장이 있었다! 머무르는 동안 한 번은 가자며 민이와 다짐했다.
 
오늘의 일정은 동물원 구경. 고모는 그거 되게 좋은데 관광객들은 잘 모르더라, 어떻게 거기 갈 생각을 했냐며 강하게 추천하셨다. Mandai가 운영하는 네 곳의 동물원(싱가포르 동물원, 리버 원더스, 나이트 사파리, 버드 파라다이스) 중 두 군데를 선택해 예약할 수 있는 패키지가 있어, 평이 가장 좋았던 싱가포르 동물원과 최근에 이전했다는 버드 파라다이스를 예약했다. 2시 경에 도착해, 동물원을 2시간, 버드 파라다이스를 2시간 보겠다는 계획.
 

'미친 거 아니냐'라는 기쁨의 말을 연이어 뱉게 하는 햇살을 거치고 도착한 싱가포르 동물원. 이름이 싱가포르 동물원이다. 앞에서 포즈를 10개쯤 돌려 가며 사진을 찍자 민이가 프로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여행 내내 연일생은 치아교정기의 부피감 때문에 어색해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해 썩은 미소와 옹졸한 입으로 가득찬 앨범을 얻게 되는데...
 

Mandai의 조경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차양막에 뚫어 놓은 창을 통해 물고기 모양의 그림자가 길을 안내했다. 말도 안 돼~ 사족으로, 이쪽은 리버 원더스 가는 길인데 화장실 들르려고 지나갔다.
날씨는 당연히 내내 덥고 습했다. 지금도 사진 보니 좀 더운 것 같다... 하지만 사진은 사기적으로 잘 나오는 사진-친화적 날씨이니 감사히 생각할 것.
당연?하지만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영어 순의 빈도로 다양한 언어가 들려왔다.
 

대뜸 기념품 숍부터 둘러보는 매점좋아인간들 ㅋㅋㅋㅋㅋ 농담곰을 닮은 양과 몽총하게 생긴 호랑이 인형이 있어서 동물원 투어가 끝날 때까지 가지고 싶으면 사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 외에도 귀여운 인형이 몹시 많아 핸드폰 카메라를 내려놓을 틈이 없었지만... 그들은 너무 비쌌고 내 좁은 집에는 인형이 너무 많았다...
 

 컨텐츠를 파악하기 위해 찍은 표지판. 많기도 하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이 표지판 앞에는 수달이 있는데 무척 활발하고 귀엽다. 서로 물장구치며 장난을 치고 있자 꽤 많은 인파가 그 앞에 서서 한참이나 구경했다.
 

동물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워서 몹시 놀랐다. 관광객이 뛰어들면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잖아...?
전반적으로 무척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고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공간도 눈으로 보기에는 넓은 편. 동물들이 전부 상태가 좋아서, 이상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건강한 상태일 때 하고는 하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많이 보여줘서 즐거웠다. 보통의 한국 동물원은 하나의 정형행동만 반복할 때가 많아서(ㅠㅠ) 어릴 때 가 봐도 기린을 보면 '아 기린이구나', 호랑이를 보면 '아 호랑이구나' 정도밖에 느끼는 게 없었는데... 그게 동물들이 즐겁지 않아서였구나, 깨달았다.
 

식물 조경이 너무 좋아서 사진의 완성도를 위해 민이를 피사체로 이용했다(?) 민이가 피로한 듯 '이제 그만 사진지옥에서 내보내 줘...'라고 부탁할 때까지 사진 놀이는 계속되었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큰 동물들은 스트레스에 적게 노출시키기 위함인지, 나와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나머지 시간은 안쪽에서 휴식하고 교대로 나오는 모양. 시기 적절하게 도착한 덕에 잠깐 기다리자 금세 사육사가 호랑이를 풀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쪽에서 쫑쫑쫑 걸어 나와 미리 달아 둔 나무 위 고기를 떨어뜨려 먹는 이벤트. 이런 식으로 가이드의 동반 하에 진행되기 때문인지 관객들과의 거리도 상당히 좁은 편이었다. 뭔가... 모든 행동이 고양이 같아서 역시 큰고양이인가... 하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동물원의 호랑이는 무척 작은 체구의 아종이라고 한다.

Too heavy to float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마 역시 하마 중에서 작은 아종이라고 한다. 이후의 동물들도 대부분 작은 크기의 아종이라고 써 있었던 듯하다. 우리(cage)의 크기와 관리의 용이성을 고려한 걸까?

하마 옆에는 오렌지 착즙기가 있어서 한 잔 뽑아 마셨다. 이후 싱가포르 여행 내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맛은...사실 시판 오렌지주스가 더 맛있다. 당연한 게 생오렌지를 착즙하면 생오렌지 맛이 날 테니까... 나는 생오렌지 별로 안 좋아한다. ㅋㅋㅋㅋ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과일 중 하나이다.
 

호주관에는 캥거루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동물들이 보였는데, 길에 저런 경고문이... 가끔 뛰어넘어서 맞은편으로 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그럴 만한 높이로 보이긴 하지만 어떻게 관리하는 거지?!!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직업만족도 100%이신 듯한 사육사 분과, 겨드랑이 긁는 캥거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육사 분이 캥거루를 복복복 긁어 주자 옆의 일본인 관광객이 '요시요시' 라고 중얼거리는 게 너무 웃겼다 ㅋㅋㅋㅋ
 

장승과 모아이 그 사이 어딘가

원숭이 관. 더위를 피해 기분 좋게 늘어져 있는 원숭이와, 움직임이 활발해 민이가 특히 좋아했던 마다가스카에 나오는 대왕님 원숭이. 뒤쪽에는 유인원 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었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싱가포르 동물원에서는 동물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코끼리 섹션은 그래도 어쩔 수 없는지 구수한 시골 냄새를 풍겼다. 덩치를 감안해 몹시 큰 크기의 사육장에 키우고 있었고 그곳을 원형으로 둘러싼 정자 같은 것이 연달아 놓여 있었다. 조금 덥던 차라 앉아서 선풍기 바람을 조금 쬐었다. 코끼리는 건초를 신나게 먹고 있었다.

동영상 서비스가 종료되어 해당 콘텐츠를 재생할 수 없습니다.

오랑우탄(침팬지???)들이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 바로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방목해 두어도 어디 안 도망치는 건가 다시금 놀랍고 의문스러운 지점. 행복도는 확실히 높아 보인다.

아프리카관. 코뿔소, 신기한 모양의 귀를 가진 야생 돼지, 얼룩말. 얼룩말은 실제로 보니 그 기묘한 무늬가 마치 생물이 아닌 무슨 모조품 같아서 몹시 신기했다. 코뿔소가 실제로 소보다는 말에 가깝다는 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검색해 보니 목(Order) 단위로 같은 거라 그다지 친척이라 할 만한 관계도 아닌 것이다... 얼룩말은 말이 아니라는 설도 들었는데 속은 말속이 맞다. 역시 카더라 아무데서나 듣고 주워섬기면 안 된다.
 

미어캣, 하이에나, 사자. 하이에나는 말 그대로 개떼처럼 몰려 다니며 이곳저곳을 누벼서 인상적이었다.
사자는 호랑이와 달리 정말 한량처럼ㅋㅋㅋ 낮잠을 자고 있었다. 게으름의 상징답군...

기린 역시 특정 간격으로 안쪽의 우리에서 내보내 보여주는 식이었다. 덕분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지 매우 건강한 모습. 이벤트의 일종으로 나무에 먹이가 될 풀을 매달아 두었다. 열심히 풀을 뜯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생동감 넘치는 행동에 더더욱 비현실적인 비주얼이 돋보였다.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파충류 관은 잘 몰라서 조금 어려웠다. 반 정도 실내관인 만큼 적당한 시점에서 에어컨을 쐬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실내관을 적소에 배치해 놓은 싱가포르동물원의 센스에 감탄해 본다. 코모도왕도마뱀과 큰 육지거북이 꽤나 귀여웠다.
민이는 코모도도마뱀이 별명인 연구실 선배에게 보여 주겠다며 사진을 찍어 갔다. 왜? 도마뱀을 좋아해? 하고 묻자 아니, 그 별명 굉장히 싫어해... 라고 답변했다. 뭐야?ㅋㅋㅋㅋ
 

트램까지 도달하자 우리가 볼 만한 것을 거의 다 보고 몹시 알차게 돌아다녔다는 것을 깨닫고 뿌듯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어택에 쫓겨 무지 바쁘게 걸었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했던 2시간-2시간을 바꾸어 2시간 반-1시간 반으로 바꾸고도 시간을 오버했지만 우리는 만족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펠리컨이 있어 퇴장까지 만족시켜 주었다. 그리고 왠지 사람이 다니는 길 바로 옆에 무방비하게 공작새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싱가포르동물원 무시무시한은 곳이구나...
나 예전에는 카피바라한테 입질하는 펠리컨 영상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펠리컨이 비둘기 잡아먹는 영상 본 이후로 그런 거 볼 때마다 심란하다. 얘들아 지금 웃을 일이 아니라고...카피바라가 새끼였다면 실제로 잡아먹혔을 거라고...실시간 잡아먹힐 뻔하고 있는 거라고...!
 
퇴장이 반드시 기념품 숍을 거쳐 가야 하는 구조이기에 조금 둘러보았다. 민이는 엽서를 하나 사고 나는 아까 보았던 몽총 2인방 중에서 고민하다 호랑이 인형을 택했다. 특히 더 어벙해 보이는 친구로.
 

버드 파라다이스는 폐장 40분 전에 입장한데다 둘 모두 발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던 탓에 의욕적으로 돌아보지는 못했다. 게다가 시간상 입구 가까이에 있는 관들만 둘러볼 수 있었는데, 입구에 가까운 곳은 길 옆에 큰 새장을 늘어놓는다는 다소 재미없는 배치를 반복했기 때문. 아마 뒤쪽에 있는 앵무새관 등은 실내라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새들을 조금 둘러보다 트램을 잘못 타고는(ㅋㅋㅋㅋㅋ) 상심해서 펭귄관에 들어가 에어컨의 은혜나 누리기로 했다.
우리는 패키지에 포함시킨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로 버드 파라다이스를 택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조금 되돌아보았다. 싱가포르 동물원의 소요 시간을 생각했을 때, 아침부터 열심히 둘러보거나, 애초에 동물원 티켓만 구매하거나, 패키지로 살 거면 다른 하나는 나이트 사파리를 선택하는 게 좋을 듯싶다. 하지만 동물원의 엄청난 규모를 생각하면 밤까지 밖에서 돌아다니기엔 체력이 부족할 수도...
 
펭귄들은 무척 활발했다. 저들끼리 줄지어 수영하러 들어가서는 또 저들끼리 줄지어 솟아오르는 게 만화 같았다. 펭귄 중에서도 아웃도어 파와 인도어 파가 나뉘는 모양인지 몇몇은 또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황제펭귄 뭔가 이미지로는 이 메다쯤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초등학생 만하다는 게 너무 귀엽다. ㅋㅋㅋ

펭귄을 귀여워하기에도 슬슬 지친 우리는 폐장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펭귄관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남은 사람이 우리밖에 없게 될 즈음 짐들을 챙겨 퇴장했다.
 

사진 컨셉은 "선생님 머리에 얹혀놓은 새 이름이 뭔가요? 앗 깜짝이야 뭐야 이거" 입니다.
오른쪽은 기념품 숍에서 발견한 병아리 인형인데, 유니와 양양이 선물해 준 꽃다발에 얹어 놨던 인형과 너무 닮아서 한 컷. 둘에게 보내 주니 저 병아리 해외파였군요~ 해서 귀여웠던 ㅋㅋㅋㅋ

식당 중 하나에 걸려 있던 모빌. 보따리를 물고 있는 걸 보아 아마도 황새이리라.

버드 파라다이스 바로 앞에 식당가가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매번 끼니를 신세 지기 죄송했기 때문에 인근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적당해 보이는 인도 요리집을 선택.
 

전리품 자랑~

주문 방식은 독특하게도 QR을 통해 인터넷 페이지에 접속하여 주문한 후 직원에게 그걸 보여주면 직원이 주방에 전달하는(?) 식이었다. 왜지... 그럴 거면 주방이랑 동기화해서 네트워크로 보내거나, 그냥 주문을 받는 게 빠르지 않나?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언어장벽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전자의 시험 운영 같은 것일까? 무인계산기 늘어 놓고 도우미 직원을 한둘 붙여 주는 다이소처럼??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생선 스테이크와 매콤한 치킨 커리, 난과 밥이었다. 생선 스테이크가 독특하게 맛있었는데 향은 강하고 간은 약하게 조리되어 탄두리치킨을 연상케 했다. 나 사실... 이 조리법 너무 킹받는다... 강한 향에는 강한 간이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의해 마치 처음 가향녹차 마셨을 때의 기분과 흡사한 부조화가 느껴지기 때문. 하지만 투덜거림이 무색하게도 몹시 잘 먹었다. 맛있다! 커리는 무난하게 맛있는 인도 커리였다.

식사를 마치고 고모네 댁에 돌아가자 자녀분들, 그러니까 민이의 육촌 동생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초 6인 첫째부터 초 1인 막내까지, 딸-아들-아들-딸 4남매. 우리는 동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면세점에서 크레용초콜릿을 뇌물로 사 갔는데 동생들은 초콜릿보다 우리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사실 나와 민이는 어릴 때 부모님 손님이 집에 오면 낯 가리고 불편해하는 귀염성 없는 어린이들이었기 때문에 자녀분들 역시 우리를 어색해할 줄 알았는데,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구경하더니 무척 환대해주어 놀랍고 고마웠다. 너무너무 귀여웠던 막내는 '언니'를 반복하며(ㅠㅠㅜ)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첫째는 우리의 일정을 묻고 들어보더니 '그럼 오래 있겠네요, 아싸~'하고 좋아해 주었다. 뭐지 이 슈퍼 외향성 가족... 싱가포르에서 거주한 기간도 길지 않고 모두 한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한국어 능력은 네이티브였다.

첫째는 무척 어른스러워서 인상깊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통했다! 보통 초등학교 6학년생과 어른이 대화가 편안하게 이루어지나요? 다른 초등학생들은 내 기억에 좀 버거웠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물두 살의 연구실 후배보다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다(미안해 후배야). 동생이 세 명이면 이렇게 되는 걸까...
둘째는 독특한 성격이었는데, 셋째나 막내와 함께 있을 때는 부쩍 어른스러우면서도, 첫째나 우리와 있을 때에는 장난꾸러기 초등학생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민이의 표현에 의하면 선택적으로 쨈민이 된다고 (ㅋㅋㅋㅋ) 셋째와 막내가 사소한 걸로 다투기 시작하자 옆에서 난처한 듯이 지켜보고 있다가 별 걸로 싸운다는 듯 귀여워하며 웃더군... 그러나 해당 감상을 나누자 민이는 '언니는 세상을 보는 눈빛에 너무 선의의 필터가 씌워져 있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아니 왜?? 본인이 보기에는 가소롭다는 웃음이었단다. (??ㅋㅋㅋㅋㅋ) 아니야... 내가 맞아...!
셋째는 평범한 장난꾸러기 남자애, 넷째는 너무너무...애교 넘치는...우리의 심장을 박살내러 온 애교 머신이었다... 우리는 손 쓸 틈도 없이 녹아 버리고 말았는데...ㅠㅠㅠㅜㅜㅜ 고모께서는 애들이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랐어도 성향이 다르다며, 첫째는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막내는 예쁜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 공주님이라고 하셨다. 흑흑... 그냥 공주님인데요.
 
셋째와 셀카 놀이를 하다가 민이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렸다. 나와 민이를 그려주겠다며 호언장담하고는 그리기 어려우니 안경을 벗으라고 종용하는 게 너무 웃겼음 ㅋㅋㅋㅋ 민이가 가져온 타투스티커를 보여주자 역시 공주님인 막내는 무척 좋아하며 '이거 해도 돼?', '언니는 이거 해', '이거 중에 뭐 할까?' 하고 신나서 여기저기 붙여 왔다. 첫째와는 아이돌 이야기를 했는데 카리나의 팬인 모양이었다. 한국인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유행도 한국과 꼭 그대로라고, 마라탕과 탕후루, 불닭볶음면, 쿠로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귀여워... 이 날 둘째는 아마 얼굴만 보고 친구 집 놀러갔던 것 같은 기억.
민이는 첫째와 막내에게 자신의 수많은 콜렉션 중 일부라며 스티커를 몇 장 나누어 주었다. 앗! 나도 가지고 올 걸! 치사해~ 아무런 준비 없이 온 연일생은 질투에 홀로 불탔다...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고 우리는 마침내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민이는 매번 샤워 순서를 양보해 주는 것에 두고두고 감사해 왔다...? 나름 훌륭한 여행 메이트. 방이 조용해진 사이 고모가 우리에게 와서 내일 일정을 말씀해 주셨다. 내일 함께 다니며 몇 군데 소개해주실 예정이시라고. 옆에 끼어 있던 막내는 '왜 엄마만 언니들이랑 놀아?'하고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막내는 학교 갈 시간이었기 때문ㅜㅜ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좋아해주는 데에 대한 고마움과 한층 더 크게 느껴지는 귀여움에 녹아 내렸다. 막내가 자러 간 뒤에도 우리는 한참이나 헤어나오지 못했다... 귀여워 귀엽다구....
 
다음날 입을 것과 챙길 것만 꺼낸 후 모든 짐을 가방에 봉인하는 루틴을 마치고, 바른생활 연일생은 곧바로 잘 채비를 했다. 여행의 취침 시간이 맞냐며 궁시렁거리던 새벽형 인간 민이는 조금 더 뒹굴다 잤다고 한다.
 

*
*
*

 
3일차: 고모와 투어, 갤러리, 마트

이 날은 감사하게도 고모가 가이드를 해 주신다며 우리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녀 주셨다. 주요 루트는 보트 키 근처.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도 못 보고 신나게 자고 있었는데 민이의 증언으로는 아침 일찍 넷째가 우리를 슬쩍 보고 갔다고 ㅋㅋㅋ 모두 학교를 가 조용해진 식탁에서 고모와 헬퍼분이 차려 주신 아침을 먹고, 채비를 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CapitaSpring. 51층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마리나 베이 샌즈를 포함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어 절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분이 무언가의 이슈로 51층에 갈 수 없다는 경고를 하시는데... 과연 눌러 보니 폐쇄되어 있다. 올라온 김에 전신거울도 있겠다,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한 컷.
고모는 몹시 아쉬워하셨지만, 나머지 네 층 정도로 구성된 지상 공원도 무척 아름다웠다.
 

온통 사진을 찍을 곳들 뿐... 어떻게 찍어도 예술인 풍경 앞에 연일생의 사진 욕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고... 농머생 두 명은 본능적으로(?) 식물들과 관리 방법에 조금 관심이 갔다. 이 규모의 반 실내 정원을 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거지.
 

건물 앞에는 고모가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말씀하신 %아라비카 커피가 있었다. 퍼센트 모양(%)이 '응'자를 닮아서 응커피라고 부른다고. 고모가 한 잔 사줄 테니 마시겠냐고 물어보셔서, 고모와 민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에스프레소를 시켜 시럽을 타 먹었다. 향이 좋고 조금 로스팅이 강했다.
 

삼성 허브가 있어서 반가웠다!
연일생의 풍경 사진 자신작들 (feat. 민이의 뒷모습)

그 뒤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 건물, 이 거리, 이 지역에 대한 설명을 마치 준비된 가이드처럼 유창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쓰려니 기억이 안 난다. CapitaSpring에서 보트 키로 가는 방향으로 한 블럭을 끼고 돌았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즐비한 식당 골목과, 유럽풍을 따온 듯한 카페 술집 거리가 보였다. 어떤 레스토랑 입간판에는 굉장히 터프한 질감의 초콜릿 케이크를 홍보하던데 너무 먹고 싶었던 ㅠㅠ
 

중국 소재 석유화학 회사의 번쩍번쩍한 건물 앞에 도달하자 고모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소개해 주셨다. 아~ 시계 녹아내리는 작품~ 하자 고모가 어떻게 아냐며 우리의 상식을 칭찬해 주셨다. 아녀요... 그가 우리나라에서 조금 핫할 뿐... 설명에 따르면 진품이 여러 개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라고. 팝아트 같은 건가? 여하튼 살바도르 달리 취향으로 생겼다는 건 빤히 보여서 좀 재미있었다.

물결에 햇빛이 반짝반짝 반사되는 보트 키의 풍경.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도 여유로이 지나가고 있었다. 햇살이 워낙 사기적이어서 모든 사진이 예쁘게 나왔다. 강을 정면에 두고 왼쪽으로는 식당가가 길게 줄 지어 늘어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강을 건너는 다리와 <영사관을 닮은 뭐 하는 곳인지 모르는 건물>이 있었다. (ㅋㅋㅋㅋㅋㅋ)

아름다운 건물들이 무척 많았다! 이쪽에 특히 집결되어 있긴 하지만, 싱가포르는 전반적으로 멋진 건축물들이 무척 많다. 싱가포르 여행 내내 우리를 감탄하게 한 점은 1. 청결, 2. 조경, 3. 건축. 민이는 '극도로 발전한 도시 국가인데 동남아 느낌도 잃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왠지 SC제일은행이 있었고...



크다. 둔둔하다.
귀여운 빵뎅이

몹시 둔둔한 새 동상도 있었다. 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는 모양. ㅋㅋㅋㅋ 귀여워~ 만약 기념품 숍 같은 데에서 작은 스태츄 형태로 판다면 무조건 사 갈 텐데 아쉽다. 예술작품이니 쉽게 모조품을 만들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건물이나 머라이언 동상 같은 것도 마스코트화해서 많이 팔고 있잖아요... 팔아 줘... 머라이언 vs 참새? 당연히 참새 압승.
더위와 습도를 이기지 못하고 건물 내부에서 잠시 에어컨의 은총을 누리던 도중 저 뒷모습이 보이자 셔터를 참을 수 없었다. 민이가 깔깔 웃으며 찍을 만하다고 공감해 줬다.
 

공공기관 건물이라던데 정확한 기억은 안 남.
 

고모부께서 점심을 대접해 주신다고 하셨기에 건물 안을 좀 더 구경하기로 했다. 1층의 여유 공간에는 작은 전시가 열려 있었는데, 이 그림을 포함해 주로 한지와 먹을 사용한 그림이 십여 점 걸려 있었다.
 
고모부를 뵙고, 보트 키에 늘어선 가게들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고모부가 추천하시는 식당이 나왔다. 싱가포르에 왔으니 칠리 크랩은 먹어 봐야 한다시며. 우리는 머릿속의 먹킷리스트 하나에 마크를 하며 환호했다.
 


고모부의 거침없는 주문에 우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모두 엄청나게 맛있는 메뉴였기에 쓸어 먹었다. 가격표가 무지하게...찍혀 나오는 걸 봤는데 너무나도 태연히 사주셔서 우리는 여행 내내 두 분의 대접에 달달 떨며 황송해했다...
전채로 나오는 채소 볶음에는 짭짤한 새우 향이 강하게 입혀져 있어서 맛있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맥주 안주 맛... 새우에는 크리스피한 고물이 묻어져 나왔다. 민이는 여행 중 먹었던 메뉴 중 가장 맛있었던 것으로 이걸 선정. 게살볶음밥은 무난한 볶음밥 맛이었으며, 칠리 크랩은 맛보다는 호화롭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두툼한 게살을 쇠막대로 깨서 먹고 있자면 이게 웬 사치인가 싶고... 양념 맛은 역시 새우 향에다가 적당히 짭짤한 맛? 한국인이 생각하는 칠리에 가까운 맛은 아니다. 여느 동남아 음식과 유사하게, 간보다 향이 더 강한 느낌.
내 앞에 흘린 음식들을 보며 '저 상견례 1등 탈락일 것 같은데요...'라고 중얼거리자 고모는 '흘린 거 얘기는 하지 말자~' 하며 고모부를 가리키곤 웃으셨다.
 

점심시간을 함께 보내고 회사로 돌아가는 고모부와 헤어진 후, 온 길을 거슬러 다리를 건너 갔다.
 


내셔널 갤러리 근처의 건물들. 고모가 이것저것 많이 설명해 주며 회의장이며 건물 내부를 데려다 주셨지만 내가 다시 설명할 재간이 없으므로 생략하겠다. 가운데 사진은 건물의 중간을 찍은 모습인데, 왼쪽을 지을 때에는 돈이 많아서 복잡한 디자인을 선택했으나 오른쪽을 지을 때에는 재정이 비교적 부족해서 음각으로 대충 톤앤매너만 맞추었다는 비화가 있다. 놓고 보니 꽤 재미있다.
 

내셔널 갤러리. 고모는 우리에게 건물 설명을 마치고는 먼저 댁으로 돌아가셨고, 우리는 앉아서 조금 회복을 하기로 했다. 입장 티켓을 끊는 데스크에서는 히잡을 쓰신 직원 두 분께서 까르르 웃으시며 사담을 하다가, 우리를 보고 한국인인 걸 인지하자 무슨 항공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제주항공이라 하니 별 말씀은 없으셨지만, 친구나 지인이 한국계 항공 회사에서 근무하시는 건가 추측해볼 수 있었다.
갤러리의 고풍스러운 실내 디자인과 다양한 체험형 설치 미술은 곳곳에서 사진 찍기 놀이를 하기에 몹시 적합했다. 그렇잖아도 각기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갤러리'스러운 복장을 갖춰 입고 온 둘은 신나서 되는 대로 사진을 찍어 댔고 연일생은 꽤 일본인 오타쿠 소녀처럼 나온(?) 카톡 프로필 사진감을 몇 장 건졌다.
 

이만한 총이 발견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과 함께, 관객들에게 대답을 적도록 연습장을 펼쳐 두는 설치 미술이 있었다. 몇 자 썼는데, '(오용될 우려가 높은)흉기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기관에 연락하겠다' 정도로 썼던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유창한 영어로 적지는 못했고 초등학생 어휘로 뜻만 전했다.
 

무척 재미있는 그림ㅋㅋㅋㅋㅋㅋ

다양한 화풍과 형식의 작품이 있었지만, 마음에 들어서 찍은 작품들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대쪽 같은 취향.
나는 아무튼 이해하기 쉬운 편이 좋다. 추상화도 좋아하지만 미적으로 훌륭하거나(사진에 포함된 몇 작품에 해당) 하다못해 제목에 무언가 의미를 함축해 놓은 작품의 이야기이지, 흰 캔버스에 선 몇 개 그어 놓고 <무제-11>, <구와 선> 이런 제목 붙여 놓는 건 정말...몹시...불호이다.
갤러리 소장 작품들 위주로 보다 보니 올드패션이 취향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 작품은 '사회적 혹은 예술적 맥락의 의미를 함의한 신선한 형식의 고전 재해석'이라는 걸 분명히 밝혀 둔다. 어렵고 가혹하다는 걸 안다... 취향이야 예전부터 비슷했지만 확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14년에 개최된 네오산수화 전시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레고, 영상 미디어, 설치 미술, 석판에 머리카락(!)으로 표현한 산수화들이 무척 신선했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가 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 계열인 건 맞으니 어느 정도 옛날 취향은 맞으려나...?
 


그림에서 빛이 나는 게 신기했던 작품들.

아름다운 작품들.
 

구경하는 데 지친 우리는 funan mall에 들러 타로볼을 먹고 저녁을 대신할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 가기로 했다. 하지만 정보 혼동으로 가려던 타로볼 가게가 입점해 있지 않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하는 수 없이 지하 1층 식품관을 둘러보기로 결정. 푸드코트와 각각의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백화점 지하 층은 굶주린 자들에게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입구에 가까이 있어 우연히 들른 Chateraise라는 일본식 양과자집. 싱가포르에 있는 일본식 서양 디저트 가게에 방문한 한국인이라니 조금 웃기다. 작은 단위로 팔아서 그런지 가격도 웬만한 국내 카페보다 싼 편인데다 말도 안 되게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으므로 시간 나시는 분들은 꼭 가 보시라... 그 때 들른 첫 가게이기도 하고, 우리가 여기 말고도 이곳저곳 들를 것이라 생각해 많이 사지 않았는데, 돌아가서 먹어보고는 왕창 사올 걸 후회했다.
 

Fair price는 정말 fair한 price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 3개 10싱가포르 달러인 쿠키, 다른 데서는 한 개 6~8 싱가포르 달러로 팔고 있었으니 가히 닉값을 한다 할 수 있겠다. 맨 앞에는 저렇게 기념품으로 인기가 많은 상품들을 줄세워 두었고, 뒤쪽에는 평범한 소규모 슈퍼마켓 구성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기념품을 거의 여기서 끝장내겠다는 생각으로 기념품 줄 사람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 가며 상품을 담았다. 나는 싱가포르 쿠키 4번들과 1+1 할인하는 팩을 몇 개 샀고, 빵떡이에게 줄 카야잼도 샀다. 민이는 작은 나무상자에 포장된 귀여운 티 제품을 위주로 구매했다.

우리는 점심을 말도 안 되게 성대하게 대접받았기에 뭔가 사들고 들어가고 싶었다. 맛이 궁금했던 구아바는 소포장된 걸 샀고, 몹시 저렴했던 용과, 먹고 싶었던 커다란 거대 망고, 그리고  아이들 줄 필라델피아 치즈케이크가 최종 선택되었다.
집에 가는 길은 급행 버스를 잘못 타서 역방향으로 환승해 오는 등 고생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과일이 몹시 무거워서 꽤나 곤욕을 치렀다. 급행 표시를 봤어야 했는데 왜 우리는 무심코 타 버렸는가...
 

힘겹게 집에 도착하자 막내가 '언니'를 연속해서 네 번쯤 부르며 우리에게 달려와서 안아 주었다. 그리고 환영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춰 줬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하며 사 온 것들을 고모께 건넸다. 뭘 이런 걸 사왔냐시기에 같이 먹자고 사 왔다며 무마했다. 헬퍼분이 과일을 잘라서 내와 주셨고, 아이들은 '망고!' 하며 무척 좋아했다. 나는 '여기서 흔한 과일은 별로 환영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라고 했으나 민이는 '아니지, 우리나라에서 수박은 흔한 거지만 언제 먹어도 좋잖아'라고 했다. 납득할 수 있었다. 퇴근 후에 수박 사 온 아빠 같은 느낌이었다니 다행이에요... 치즈케이크 사 왔다고 했을 때에는 막내가 어린이 특유의 솔직한 화법으로 치즈케이크 안 좋아한다고 말해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첫째가 식사 후 '엄마 나 치즈케익~' 하고 외쳐서 조금 안심했다.
점심을 거나하게 먹은 우리는 배도 부른데다 매 끼니마다 폐 끼치고 싶지도 않았기에 따로 우리끼리 간식상을 차렸다. (하지만 날짜를 지나면서 우리는 서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끼니를 거절하는 것이 더 애매한 일이라는 것을... 순순히 사육당하는 것이 고모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우리 것을 탐내서 고모는 급히 우리를 방에 격리하고 저녁식사를 차리셨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공수표 발행을 몇 번 해서 그런 우리의 행보에 조금 반성하기도 했는데... 그리 실망하지 않는 걸 봐선 안 될 거 아는데 그냥 찔러 본 건가 싶기도 하다.
망고는 최상급이었고 용과도 무척 달았다! 두 과일만으로도 한 끼를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아바는... 망고를 유혹하지 못했다. 식감만 생각하면 사과나 대추의 중간? 맛은 약간 당근이나 무...? 그런 느낌이었다. 왜 찍어 먹으라고 소금 같은 거 같이 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지만 저 간식들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늦게 돌아오신 고모부가 유명하다는 사과 파이를 사 오셔서 맛보라고 권하셨다...! 우리는 몹시 배부른 상태였지만 하나를 둘이서 나누어 먹기로 하고 식탁에 앉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나와 민이, 첫째부터 넷째까지 여섯이서 한 침대에 둘러앉아 민이가 가져온 보드게임 달무티와 보난자를 했다. 달무티는 이 집에도 있었던 차라, 모두들 굉장히 고수였다. 중간부터 봐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민이와 애초에 봐줄 상대가 아니라 판단한 연일생은 최선을 다해 게임을 했다. 달무티 두어 판이 끝나고 보난자로 장르를 바꾸었다. 민이 외에는 전부 처음 해 보는 게임. 콩을 키우고 거래를 하는 다소 복잡한 게임이지만, 모든 보드게임이 그러하든 한두 판 해 보면 감이 온다. 집중력이 슬슬 떨어진 연일생은 누워 뒹굴며 설명을 들었고, 두 번째 판을 할 때쯤 여러 번 반복된 고모의 취침 권고가 진심이 되어 와해되었다. 취침 시간을 거하게 어긴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이 집의 교육 방침을 교란시키고 있는 건가 또 한 번 죄송해졌지만 후에 슬쩍 말씀드려 보니 그렇지 않다고 해주셨다... ㅋㅋㅋㅠㅠ
 
민이와 나는 샤워하고 짐 정리를 대충 한 뒤 사진을 공유하고 새벽까지 떠들었다. 소유욕 강한 두 여자는 인간관계의 소유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에게 경악하고 말았다... 비몽사몽할 때까지 말을 잇다가 연일생이 기절하듯 잠들고, 민이는 조금 더 있다가 비슷하게 잤다고 한다. 세 번째 날만에 최초로 여행지의 새벽 같은 시간이었다.
 
싱가포르는 무척 독특한 곳이어서 이방인에게도 배제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아마도 유동인구가 너무 많고 현지인들끼리도 유대가 단단하지 않으며 다양성이 높기 때문이겠다. 이 독특하고 정신 없는 타국의 대도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실로 모순적이었다. 돌아가면, 이 모순에 그리움을 느낄 날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3일차 일정 종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