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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생 종합도서관/끄적끄적

Hamster(her)

by 연일생 2020. 5. 18.

 

 

 

이 친구에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라면 연민일 것이다.
그는 옥수수를 가장 좋아한다. 늘 사료에서 옥수수만 골라 가져가고, 그걸 다 먹으면 해바라기씨와 뭔지 모를 곡물을 차례로 가져가 먹는다.
그는 느긋한 성격이다. 작은 동물치고 예민하지도 않고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그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쳇바퀴 왼쪽의 침대에서 보낸다. 휴지를 넣어 주면 볼주머니가 미어지도록 욱여 넣어 가져가서는 그걸로 침대를 더 풍성하게 꾸민다.
그는 새로운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가끔씩 뚜껑을 열어 환기를 시켜 준다. 내가 본 그의 가장 행복했던 모습은 케이지를 청소해주었을 때였다. 그는 낯선 냄새를 실컷 맡다가, 평소와 다른 곳에 잠자리를 꾸렸다. 그에게 청소가 끝난 케이지는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허락된 공간에는 화장실도 밥그릇도 집도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그 공간을 알아서 분리해 쓴다. 쳇바퀴 왼쪽 모서리는 침대, 그 맞은편은 소변 화장실, 쳇바퀴 오른쪽 모서리는 대변 화장실이다.
그는 아주 가끔씩 자다가 깨서는 눈도 뜨지 않고 잠자리를 벗어나 침대의 정반대쪽으로 도망쳐 간다. 도망친다는 표현이 맞다. 공기가 들어오는 작은 틈에 코를 대고 벌름이다가, 땅을 파고 긁고 갉아내려 하고는, 이내 구석에 몸을 붙이며 다시 잠든다.
나는 그의 여생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능력도 여건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선배들이 가끔씩 그를 보러 온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는 죽을 운명이었고 홀로 살아남았다. 선배들은 그를 죽이지 못해서 키우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나의 연민이 죄책감으로 발전하지 않는 이유가 되어 주지만, 가끔씩 후회할 거라는 생각은 한다. 나는 그가 가엾다. 그는 새로운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좁디좁은 공간은 새로움이 들어찰 여지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틈이 있는 모서리에 몸을 붙이는 일뿐이다. 그게 아주 가끔 슬퍼서 나는 또 후회할 일을 생각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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