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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생 종합도서관/에세이 도전기

230330

by 연일생 2023. 3. 30.

 



어제, 나의 연구과제 전반을 맡고 계시던 post-doc 박사님께서 연구실을 떠났다. 이 분야에서 미국 2~3위에 달하는 대학에 적을 두게 되었다니 박수를 몇 번이고 쳐도 모자랄 일이다. 그는 내가 연구실을 들어왔을 적, 아무것도 모르던 학부생 시절부터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맡고 있던 연구과제의 한국인 책임자 자리가 내게 돌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함께 일을 했다. 답이 보이지 않는 데이터 더미에서도 최고의 논문을 뽑아내는 실력과 반대로, 실험을 주도하고 뒷일을 감당하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던 그는, 그러한 점 때문에 나의 사수 선배와 잦은 마찰이 있었다. 그녀보다도 좀 더 인내심이 없는 후임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나와 그는 꽤 잘 맞는 실험 파트너였다. 나는 그와 비슷하게 욕심이 많았고,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그에게는 나의 반발심을 건드리는 한국인 상사 특유의 무언가가 없었다. 그와 별개로 그의 실험 방식에 회의가 없던 것은 아니었기에, 졸업 시즌이 다가오자 따로 개인 실험을 마련한 나는 그와 얼굴을 맞대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 역시 그만의 개인 과제를 만들어 와, 최근에는 거의 볼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떠나기 이틀 전 회식 날, 그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 그는 역시 똑같은 그 자리에 앉아 날 반겨 주었다. 다소 어색해하는 내게 흔쾌히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두드린 그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을 말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계획하고, 목표에 맞추어 그것을 실행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다. 3~5년 후를 상상할 수나 있을까?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 내뱉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그게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상상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자 그는 기쁘게 말했다. 그렇지? 내 대답과 그의 반색 사이의 간격이 너무 짧아서, 나는 그가 나의 이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혼란스러운 와중에 내 말이 해답이 되어 주었던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이러한 태도가 퍽 놀라우면서 동시에 그답다고 느꼈다. 어찌 보면 가장 훌륭한 결과물을 가지고 이 연구실을 나가는 사람이 이제 와 자신이 없는 듯 말하는 것에 놀랐지만, 그의 환경과 가정,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의 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쥐가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이유는 구멍이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문장을 잠깐 곱씹어 보다가, 한국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고 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한 곳에 담으면 한 번에 전부 깨 버릴 수 있으니까, 여러 군데에 나누어 둬야 한다고. 그는 비슷한 말이라며 웃었다. 교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모두가 교수님을 따라 자리를 뜨자, 그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멋진 말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었던 그는 대신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쪽을 택했다. 몇몇 연구실 사람들도 각자 친형이나 아버지같이 여기는 사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살펴보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그가 내게 퍽 잘 맞는 상사였음을 깨닫곤 했다. 그는 사적인 자리에서 나와 만남을 가지려 하지 않았으며, 배려가 없지도 지나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완전한 어른이 아니어서 내게 뭔갈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우려는 자세로, 학부생에게 모르는 것을 격의 없이 물어 보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나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물론 그가 정한 의견을 쉽사리 바꾸는 일은 없어서, 내가 실험의 중요한 부분을 뒤바꾸는 일은 없었지만. 그것 역시도 생각이 많고 결정을 어려워하는 그의 특성이었다.
그는 떠나기로 한 날부터 교수님에게 미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순간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우리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 주었다. 건배사를 읊는 그의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식당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게 할 수 있었던 종류의 멋진 말이었음은 알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내가 곧 학위과정을 졸업하고 이곳을 떠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떠나는 날마저 그는 나의 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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