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I Stay/보물상자

강 주변에 살았던 이야기

연일생 2022. 3. 13. 01:36

나름 도심에서 평범하게 살았다 생각했는데 썰을 들은 동기 언니가 대단히 흥미로워해서 적어 봄ㅋㅋㅋ
중고등학생 때 살았던 아파트 옆에는 작은 강이 있었는데
물이 불어나면 무척 예뻐서 하교하고 돌아오는 길에 돌계단 위에 앉아 파문을 감상하고는 했다
흰뺨검둥오리가 매우 많았고 백로는 적당히 많았으며, 간혹 왜가리와 홍머리오리, 청둥오리, 쇠박새도 보였음.

이른 봄이 되면 아기 오리가 부화해서 엄마 오리가 8~9마리씩 졸졸 데리고 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운이 좋으면 태어난지 하루이틀밖에 안 되어 보이는 오리도 볼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돌다리를 가로질러 강의 상류로 넘어가려는 오리 가족 이벤트는 매해마다 돌아온다.
엄마가 돌다리 위를 올라가면 아기들도 우르르 올라가는데 꼭 마지막 한두 마리가 낑낑대며 못 올라오고는 한다.
그러면 엄마 오리가 걱정돼서 내려가 보는데, 그 때 기껏 올려 놓은 다른 아기 오리들도 우르르 도로 내려가는 게 제법 웃기고 귀엽다.
조금 큰 돌다리의 경우 여러 번 시도하다가 강가로 돌아 건너는 일도 있다.
그때쯤 되면 강변에서 산책하던 사람들이 떼로 멈춰 서서 보고 있는데, 다 건너면 단체로 박수를 쳐 준다 ㅋㅋㅋㅋㅋ
가끔씩 오리도 날 줄 아냐는 기상천외한 질문을 받고는 하는데 당연히 잘 난다. 도심을 건너 근처 시냇가까지도 날아간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새끼 오리들이 잠수를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어른 오리들은 대개 머리만 집어넣어서 거꾸로 선 자세로 물고기를 잡고는 하지만, 새끼 오리는 워낙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잠수해서 사냥하더라. 갑자기 퐁 하고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참방 하고 나오는 게 꽤나 귀엽다. 이 때쯤의 오리는 엄마 근처에 있긴 하지만 대체로 독단 행동을 하는 듯.
풀씨 같은 걸 먹는 건지 단체로 풀밭 위를 부리로 쑤시고 있기도 한다.
늦가을에서 겨울쯤에 개체수가 가장 많아 보이는데 정확한 사실은 모름. 그냥 눈으로 보기에는 그때가 제일 많다. 육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간혹 얼음 위를 걷다가 미끄러지는 오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산책하다 보면 인도에 하얀 페인트 같은 게 얼룩져 있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의 실체는...백로 똥이다. 만들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야 그 진실을 알게 되었다. (...) 그에게도 여러 선택지가 있겠지만, 꼭 날아가면서 인도 위에 싸는 걸 선호하는 것 같다...
오리는 그런 일이 없는데 백로는 간혹 인적이 드문 시간이면 인도 위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경우가 있어 사람을 놀래킨다.
백로가 물고기 잡아 먹는 장면은 몇 번 봐도 신기한 광경.

백로와 오리는 사이가 나빠서 가끔씩 싸운다. 꽤애애액 하며 날아서 쫓는데 백로의 승률이 10중 7정도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체급 차이일까...
백로와 왜가리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보이고, 왜가리와 오리의 사이는 잘 모르겠다.

물닭은 이 강변에서 본 적이 없음. 수성못에 가서야 실물을 봤다.

아주 가끔, 3~4년에 한 번쯤 못 보던 새가 떼거지로 날아들 때가 있다. 누가 봐도 갈매기 같은 외형을 가진.
강 수면에 내려앉으려다가 제대로 뜨지 못해 빠지고 다시 날아오르는 행위를 반복하는 걸 보면 바다새가 맞는 듯.
가을에서 초겨울쯤에 발생하는 일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철새는 맞는데, 갈매기도 대거 이동을 하는지, 도대체 어떤 동선을 채택했길래 바다에서 이 내륙까지 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일도 있다.

굴다리 쪽을 가면 다리와 기둥 사이에 비둘기 떼가 둥지를 튼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키우던 잉꼬들이 편식해서 남긴 모이 부스러기 같은 걸 모아 뒀다가 거기에 뿌리고는 했다. 대부분 3분 내로 몰려들어 열심히 쪼아 먹고는 하는데, 간혹 단체 비행 훈련을 나간 시간이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훈련 끝내고 오는 길에 모이를 발견하고는 '어! 이게 뭐야!'하는 느낌으로 허겁지겁 날아와 먹는 모습도 꽤 귀엽다.
요즘은 비둘기를 징그러운 세균 덩어리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라 놀랐다... 날아오는 비둘기 보고 기겁하는 친구에게 '맞다 너 비둘기 싫어하지ㅋㅋ'라고 하자 '비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 게 꽤나 상처였음ㅋㅋㅋㅠㅠㅠㅜㅜ 비둘기... 그런 입지였구나... 간혹 도심에서는 과하게 친근하게 구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흑흑. 햇볕 들면 볕 쬐면서 식빵 굽기도 하고... 대열도 바꿔 가면서 비행 연습도 하고... 맛있는 거 있으면 친구 부르고... 인간미(조류미?) 있는 애들이라구요.
사족으로, 빵떡이는 구구-구구 하는 소리를 부엉이(?)소리라 생각하던데, 비둘기 소리다...

강가에는 없지만 아파트 근처에는 직박구리가 되게 많았음(소리가 그래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것뿐일지도...). 도로 한가운데에 날개를 다쳐 피를 흘리고 있는 딱새를 주워 몇 주간 회복시킨 후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물론 집의 잉꼬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낫자마자 창문 열어 내보내 줬어야 했던 것 같지만... 여러모로 미안하구나 얘들아...

봄에는 강물에 미처 잠기지 않은 땅에 보라색 들풀이 떼지어 피고, 이른 여름쯤이 되면 강가에 마치 플라스틱 조화 같은 작은 분홍색 꽃이 엄청나게 많이 핀다. 아마 고마리나 여뀌 종류인 듯...? 그리고 키 큰 수생식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져서 잘 쓰지 않는 하류 쪽 돌다리를 지나려면 풀독이 들 각오를 해야 한다.
한여름에서 초가을까지는 금계국이 무수히 피고 잠자리가 엄청 많이 날아다닌다. 나는 초등학생 때 잠자리가 가을 곤충이라 배운 것 같은데 그것은 여름에 강에 안 와본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리고 잔디를 밟으면 연두색 방아깨비가 톡톡 뛰는 때도 있다. 이 때쯤엔 사람들이 잔디 위에 텐트를 치고 낮잠을 자거나 라면 같은 걸 끓여 먹는다.

장마철이 되면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서 넘칠 지경이 되고, 물이 빠지면 쓸려나간 처참한 수생식물들만이 널부러져 있다. 평소에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유속을 가졌는데, 장마철이 되면 사람 한 명 빠지는 순간 바로 죽겠다는 감이 확실히 온다. 무심코라도 강가에 붙어 걷지 않도록 해야 한다.
봄과 여름에는 둑 근처에 가면 기분 좋은 비릿한 향이 난다. 냄새만 맡아도 계절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물고기는 항상 강 밑의 흐릿한 실루엣만 봐서 잘 모르겠음... 약간 송사리나 미꾸라지 같은 실루엣이긴 한데 넓적한 물고기도 위에서 보면 그런 실루엣일 것 같다.
소금쟁이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녹조가 심해지거나 물이 좀 마르면 간혹 출현했던 것 같기도...?

 

겨울이 되면 강둑 상류의 강이 편평하게 얼어서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즈음에는 2~3일에 한 번씩 얼음썰매를 탔다.

날이 추우면 귀신같이 노점상들이 하나둘 모여드는데, 오전에는 2~3팀, 오후가 되면 10팀쯤 나와 있는 걸 볼 수 있다.

조각칼 같은 것으로 운전하는 날 달린 나무 썰매는 3000원, 끈 달린 플라스틱 눈썰매는 5000원에 대여할 수 있었다.

전자는 노점상에 따라 아주아주 낡고 클래식한 것이 걸릴 때도 있다. 꽤나 무거우나 그게 가장 매끄럽게 나간다는 아이러니함도 맛볼 수 있다.

후자는 2명이 필요하지만 전자에 비해 엄청나게 빠르게 눈 위를 미끄러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단점이라면 자율주행이 안 되는 점과 끄는 사람이 심심해지는 점이 있겠다.


산책 나온 강아지는 언제 가도 항상 있는데, 계절별로 가장 산책하기 좋은 시간대를 고르면 역시 가장 많다.
큰 개부터 아주 작은 강아지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는데, 소형견들끼리 조우하면 90%의 확률로 맹렬히 짖는다...!
언제는 초면인 대형견이 벤치에 주인과 함께 앉아 쉬고 있는데
어머니와 내가 근처의 돌계단을 오르려 가까이 가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줘서 고맙고 귀여웠던ㅠㅠㅠㅜ
꼬질꼬질한 동네 개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간혹 볼 수 있다.

고양이는 거의 볼 수 없고, 아주 가끔씩 흑염소...가 있다. (...?)
그냥 사람 다니는 산책로 옆에서 풀을 뜯고 있다...
나는 그 근처에서 흑염소를 키우는 집이 있으리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마도 인근의 주인이 가끔 풀어 놓는 모양... 이것이 공유지의 비극?

그 외에도 돌다리 위에서 젖은 새 발자국을 본다거나
눈 위에 남겨진 작은 족적을 보는 등 귀여운 일들이 정말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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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길어진 추억팔이... 인프라로 보나 상권으로 보나 매우 도심지긴 했지만 강 하나 있다고 이렇게 자연과 사계를 겪으며 자랄 수 있었다는 점이 참 고맙다. 어머니가 늘상 '강이 참 고맙다'라고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무 한 그루 없는 원룸살이 하다 보니 절실히 깨닫게 됨^^...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건 꽤나 풍부한 풍경이었구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적당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자라는 게 좋아 보인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매일매일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나라는 인간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했을 거다. 오늘의 추억팔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