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표류기(1): Starting
언제나 큰 변화는 예상치 못한 계기로 갑작스레 찾아온다지만
2년 반 동안 하루 3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던 장거리통학러가
'아 기숙사비 환불하고 이어살기나 알아볼까'라는 생각을 한지 5일만에 자취를 하게 될 줄은 또 몰랐다.
*이어살기: 세입자가 놓는 월전세 a.k.a. 월세의월세
자취가 처음인 건 물론이거니와 기숙사도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 처음 신청해서 합격한 건데 코로나 사태로 못 들어가고 있는 거라서…. 독립생활의 모든 게 토탈리 처음이다.
학교 에타의 이어살기 게시판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게시글은
1. 학교에서 매우 가까움, 지은지 얼마 안 된 깨끗한 건물
2. 딱 맞는 가격(2개월 계약, 보증금 20에 월세 22, 기숙사비 넣어둔 게 64, 20+22+22=64)
3. 기본 생활용품을 두고 가신다고 함(드라이기부터 조리도구 등)
이상의 세 가지 메리트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과정을 생략하고 아무튼 어제부터 혼자 살기 시작하는 연일생…. 통싸강 결정났는데 자취 시작하기 정말 레전드다ㅋㅋㅋㅋ
생활용품 거의 다 두고 가셔서 가져올 게 없을 줄 알았는데도 청소에 짐 정리에, 두 시간은 걸린 것 같다. 나름 미니멀리스트인데.
작은 다이소서랍장 하나와 수납바구니 하나, 평소 들고 다니는 가방, (상비약이나 충전기 등은 전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침구, 의류, 수건, 책 몇 권, 양치도구와 샤워타올,
수저와 그릇 두 개, 접시 두 개, 손잡이가 달린 유리병 컵 하나.
그 정도를 옮기는 데에도 차가 가득 찼다.
그리고 다음주에는 베이스와 앰프, 다리미를 들고 올 예정이다.
문명화된 인간에겐 정말 많은 이기들의 보살핌이 필요하구나….
짐을 풀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공간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라면 하나를 부수어 먹고 샤니호떡을 데워 먹으며 첫날을 보냈다. 낯선 전자레인지로 돌린 호떡은 딱딱했다.
너덧 시에 입주했는데 자기 전까지 이 리터짜리 생수병 하나를 다 비웠다. 나는 내가 액체를 많이 못 마시는 타입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유 모르게 외롭고 어색하던 첫날이 지나가고, 오늘이 되어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집에 오는 것이 즐거워졌다. 나도 집을 걸어서 간다! 걸어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핀 꽃은 왜 그리도 예쁘던지. 날은 왜 그렇게 좋던지.
어제처럼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평생 피해가며 살 알았던 요리를 자발적으로 해 먹었다. 그래봤자 계란볶음밥이래도, 무언가를 해 먹는 게 즐겁다는 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누구의 요구도 없는 요리는 사실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일이다. 그걸 스물 세 살이 되어 햇반 돌리는 법을 찾아보면서야 깨달았다.
특별한 날을 자축하기 위해 사온 약간의 사치품, 아마스빈 타로밀크티. 냉장고에 넣고 아껴 두었다가 식사 후에 마셨다. 행복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아낄 줄 안다는 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담담한 행복이 지속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대로만이라면 좋겠다.
지금의 심정을 좀 더 상세히 서술하여 남겨두고 싶지만 나는 오전에 체력을 몰아 쓰는 타입이고 지금은 저녁이다.
기록은 언제든 조금씩 덧대어 쓰면 되는 일이니까 뭐, 서두를 이유는 없다.
-------- 오늘 쓴 물건 --------
-비누(비누 받침대), 치약칫솔, 양치컵, 샴푸, 바디워시, 샤워타올, 수건, 화장실 슬리퍼, 휴지(휴지걸이)
-접이식 식탁, 전자레인지(멀티탭), 인덕션, 접시(그릇 건조대), 숟가락, 수세미(수세미컵), 주방세제, 주방용 고무장갑, 컵, 위생봉투, 냄비받침
-프라이팬, 나무 뒤집개, 주방가위, 소금, 후추, 식용유, 굴소스
-세탁기, 뽑아 쓰는 세탁세제, 빨래건조대
-의자, 침대, 침구, 핸드폰 충전기, 옷, 속옷, 양말, 마스크, 옷장, 옷걸이, 휴지, 쓰레기봉투(쓰레기통), 빨래통, 신발, 블라인드
-가방, 필통, 지갑, 이어폰, 다이어리, 휴대용 치약칫솔